실업선수 시절 낙차로 조기은퇴 코치 활동하다 경륜선수로 복귀 “은퇴? 팬들이 알아주는 한 최선”
그는 피를 보면 열정이 솟는 사람이다. 중학교시절 또래보다 큰 덩치 덕분에 시작한 유도. 훈련만 가면 선배들이 때렸다. 이유 없이 맞아도 항변할 수 없던, 구타가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훈련태도를 트집 잡아 선배가 손찌검을 했다. 손바닥이 뺨을 지나가자, 뚝뚝 코피가 매트에 떨어졌다. 가슴에 폭풍이 일었다. 잠시 후 메다꽂은 선배 위에서 조르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유도부를 나온 후 구타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얼마 후 자전거를 공짜로 준다는 얘기에 사이클부에 가입했다. ‘그 난리를 겪고도 또 운동이냐’고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이클을 시작한지 보름만에 낙차를 했다. 온 몸이 피로 물들었다. 그 피가 의욕에 불을 붙였다. 모두가 사이클을 그만둘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다친 다리가 채 낫기도 전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페달인생, 강산이 세 번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전거 위에 앉아있다. 그는 베테랑 경륜선수 김경남(46)이다.
- 아마 시절은 어땠나.
“유난히 부상이 잦았다. 서울체고 1학년때 전국체전을 1주일 앞두고 도로 훈련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팔과 갈비뼈가 부러질 만큼 큰 부상이었고 1년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사이클을 반대하던 아버지가 막상 내가 다쳐 쉬게 되자 재활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그 도움으로 이듬해 운동을 재개했고, 3학년때 3km 개인추발 아시아주니어신기록을 세웠다. 이전 기록을 6초나 앞당겨 한바퀴를 덜 탔다는 오해를 받았다.”
- 코치를 하다 경륜선수로 전향했다.
“속초시청 실업선수 시절 훈련 중 낙차를 했다. 그 사고로 안면신경 마비 증상이 생겼고 결국 조기은퇴를 했다. 덕상중, 서울체고에서 코치로 활동할 때 경륜이 출범했다. 많은 동료들이 대거 프로무대로 갔고, 그들이 뛰는 걸 보자 승부욕이 깨어났다. 현역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때라 경륜 교관을 하던 한체대 선배의 권유를 받고 선수 복귀를 결심했다.”
- 경륜선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한창 연애 중이던 지금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내 몸무게가 95kg쯤 나갔는데, 괜히 욕심을 부리다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됐던 것 같다. 아내를 설득해 몸만들기를 시작했고, 1995년 3기 후보생이 됐다.”
- 아내와의 러브스토리를 들려 달라.
“속초시청 코치 시절 양양여고 사이클 선수였던 아내를 알게 됐다. 아내가 성인이 된 후 5개월간 열렬히 구애해 연애를 시작했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처가가 강원도 양양 물치항에서 횟집(꼭지네)을 하는 덕분에 해물매운탕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 19년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주는.
“데뷔 첫해였던 1996년 제1회 공단이사장배다. 빅매치 첫 우승(선발급)이라 감격이 컸다. 2000년 모범선수상, 2011년 공로상, 2003년 우수경기인상을 수상했다”
- 현재 한국경륜선수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선수회는 경륜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1998년 결성된 사단법인이다. 선배로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원을 맡게 됐다.”
- 9월 27일 열린 ‘경륜 전설들의 대결’ 이벤트 경주에 참여했다.
“노장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레이스를 펼쳐 의미 있었다. 7명 중 6등에 그쳤지만 성적과 상관없이 무척 즐거웠다. 돌아보니 함께 데뷔했던 47명의 동기 중 단 7명만 현역에 남아있다. 경륜은 몸 관리를 잘해 성적만 잘 내면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세월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 선수로서 목표와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은퇴 시점을 2∼3년쯤 후로 잡고 있다. 단 한명의 팬이라도 알아준다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후배들이 경륜선수로서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비인기 종목에다 베팅스포츠의 편견이 있지만, 자전거 동호인이 늘고 있는 만큼 선수들 모두가 ‘경륜 홍보대사’라는 각오를 새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