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절정에 달했던 16일 서울 잠실구장. 귀마개와 목도리 등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싼 한 선수가 텅 빈 야구장을 뛰고 있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금방 끝날 것 같던 달리기는 꼬박 열 바퀴를 채우고서야 끝났다.
비활동 기간에, 그것도 따뜻한 실내가 아닌 그라운드를 뛰는 저 선수는 누구일까. 크게 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더그아웃을 향해 들어온 그가 목도리를 벗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는 두산의 최고참 선수 홍성흔(37)이었다. 영하 10도의 차가운 날씨였지만 얼굴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야말로 이 추운 날 웬일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저는 시한부 선수잖아요”였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정말 그랬다. 기자는 신인 때부터 그를 봐 왔지만 그는 어느덧 유니폼을 벗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됐다.
특유의 털털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집에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안해요. 솔직히 언제까지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그의 계약 기간은 2016년까지 2년 남아 있다). 밟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라운드에 있고 싶어서요.”
홍성흔의 모습에서 다른 한 선수의 그림자가 겹쳤다. ‘국민타자’ 삼성 이승엽(38)이다. 이승엽은 시즌 중반부터 틈만 나면 이렇게 말했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나면 허투루 보낸 한 타석 한 타석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둘은 야구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다고 할 만한 스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야구가 배고팠다. 배고픔은 간절함으로 이어졌고, 간절함은 좋은 성적으로 돌아왔다.
홍성흔은 올해 타율 0.315에 20홈런, 82타점을 기록했다. 쟁쟁한 후배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팀 내 홈런 1위다. 이승엽의 부활은 더욱 극적이었다. 지난해 타율 0.253에 13홈런으로 주춤했지만 올해 타율 0.308에 32홈런, 101타점의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역대 최고령 30홈런 고지에 오른 그는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들이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남몰래 흘린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년만년 현역 생활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멋진 마무리다. 밀려서, 뒤처져서 하는 은퇴가 아니라 정상의 자리에서 자기 발로 걸어 내려오고 싶어 한다. 홍성흔은 “정확한 때는 말할 수 없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은퇴 시기가 있다. 그때까지는 죽을힘을 다해 팬들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했다. 이승엽도 “나만이 생각하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 후엔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을 것”이라고 했다.
은퇴를 앞둔 선수들은 대개 “이제 야구의 재미를 좀 알 것 같은 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홍성흔과 이승엽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들의 열정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기자는 한 명의 팬으로서 이들이 최대한 오래, 그리고 멋있게 야구를 계속하길 희망한다. 올 한 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좋은 모습 보이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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