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들어서면 꿈은 현실이 됐다. 스타 탄생의 무대였고, 아쉬운 작별의 자리였다. 환희와 탄식의 교차를 지켜보는 팬들도 함께 울고 웃었다. ‘한국 스포츠의 요람’이던 그 장충체육관이 17일 팬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다. 1963년 2월 1일 국내 최초의 실내 경기장으로 완공된 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기면서 노후돼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간 지 약 2년 7개월 만이다.
○ 꿈이 이뤄지는 공간
약관(20세)이던 경남대 2학년 이만기는 1983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천하장사 민속씨름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만기 시대를 알렸다. 어느덧 50줄에 접어든 이만기 인제대 교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장충체육관을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야외 운동인 줄만 알았던 씨름이 실내 스포츠가 된 출발선이 바로 장충체육관이다. 예전 화장실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는데…. 체육관을 보면 한국 사회의 변화상도 알 수 있다”고 했다.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인 홍수환 한국복싱위원회 회장에게도 장충체육관은 잊을 수 없는 무대다. “1969년 5월 10일 데뷔전과 1980년 12월 19일 염동균과의 은퇴 경기를 치른 장충체육관은 아버지 같은 존재다. 고별 경기는 국내 최초로 컬러TV로 중계됐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장충체육관이 복싱의 중심으로 다시 섰으면 좋겠다.”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박치기 왕’ 김일(2006년 작고)이 직접 후계자로 지목한 프로레슬러 이왕표는 “돌아가신 김일 선생님이 장충에서 박치기로 일본 선수들을 꺾는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왕표는 은사처럼 장충체육관에서 고별 경기를 치르려고 4월 26일 체육관을 빌려 놨다.
프로농구 최고 명장인 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상명초등학교 4학년 때 첫 경기를 거기서 했다. 초등학교 시절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 정기전을 보려고 장충체육관 담을 몰래 넘어갔다. 그때 연세대의 푸른빛에 강한 인상을 받아 진로를 결정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박신자, 강현숙, 박찬숙 등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들은 차례로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서울시설공단은 17일 장충체육관 재개장식에 스포츠 스타들을 초청해 다양한 이벤트를 펼친다. 이만기, 홍수환, 이왕표뿐 아니라 신동파(농구), 장윤창, 조혜정, 김화복(이상 배구), 이준희(씨름), 박종팔, 김광선(이상 복싱) 등 왕년의 별들이 총출동한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최근 가수 조용필 팬사이트에는 “필님(조용필)이 다시 장충체육관에서 십(十) 자 무대를 만들고 공연해 줬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조용필은 자주 장충체육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장충체육관은 조용필이나 전영록, 이선희 같은 대스타가 아니면 관중석을 다 채울 수 없는 ‘초대형 공연장’이었다. 정치적 정당성이 떨어지는 군사 독재 정권이 이곳을 취임식 무대로 삼은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 탄생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장충체육관은 6·25전쟁 이후에 필리핀이 설계해서 건물을 지었다. (그때) 한국의 일류 건설 회사들이 밑에서 하청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필리핀을 국빈 방문한 2011년 11월 동포 간담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역시 같은 취지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른 이야기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리는 것처럼 장충체육관이 문을 열던 1960년대 초반 한국은 가난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반면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었다. 하지만 한국건축역사학회에 따르면 김정수 연세대 교수가 장충체육관 건축 디자인을 맡았고, 최종완 박사가 구조 설계를 맡았다. 시공은 삼부토건 담당이었다. 당시 돈으로 9200만 원이 들어간 공사비 역시 전액 서울시 예산이었다.
안창모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이사(경기대 교수)는 “장충체육관은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우리 기술로 된, 우리 자금이 들어간 건축물”이라며 “일부에서 ‘그래도 시공 과정에서 필리핀 도움을 받은 건 사실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완전히 낭설”이라고 말했다. ○ 장충 시대의 부활
1980년대 후반까지도 장충체육관의 위상은 굳건했다. 밤낮으로 열리는 경기로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도심에서 가까운 데다 지하철 3호선과 동호대교 개통으로 접근성이 더욱 좋아지면서 스포츠뿐 아니라 공연, 종교 행사 등도 빈번하게 치러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유도와 태권도(시범경기) 경기가 열리며 국제적인 주목도 받았다. 당시 유도 금메달을 딴 뒤 시상식에서 용무늬 한복을 입었던 김재엽은 “내 인기가 요즘 박태환보다 더 있었다”고 했다.
스포츠 건설 전문가들은 경기장을 앵커(닻)로 삼아 주변 경기를 살린다는 뜻인 ‘SAD(Sports Anchored Development) 효과’를 강조한다. 장충체육관 재개장을 주변 상권에서도 반기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충체육관 근처에는 유난히 원조 족발집이 많다. 족발은 함경도 음식으로 6·25전쟁 후 실향민들이 영양가가 높다는 이유로 즐겨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충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이나 농구 경기가 열릴 때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족발이 유명해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족발 골목이 형성됐다.’(중구향토사, 서울중구문화원 발간).
장충체육관은 이번에 다시 문을 열면서 좌석 크기를 한국인의 표준 체형에 맞춰 기존 43cm에서 51cm로 늘렸다. 이 8cm에 스포츠는 물론 50년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고 주장하면 과장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고자 새로 단장한 장충체육관이 막을 올릴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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