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로 떠나기 하루 전날 만난 최향남(44·사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평소처럼 밥을 먹었고(체력 유지를 위해 두 그릇을 먹었다), 차를 마셨으며(숙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커피 대신 차를 마셨다), 내일 또 만날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한 뒤 이튿날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떠나는 게 어느덧 익숙한 일이 돼 버린 듯했다.
뻔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메이저리그를 꿈꾸고 있냐”고, “언제까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거냐”고.
지난해 말 그가 몸담고 있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해체된 뒤 그도 ‘제2의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다. 국내 한 프로 팀이 그에게 코치 제안을 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는 편한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택했다. 겨우내 경남 진주와 제주도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준비를 해 왔다. 그러다 우연찮게 오스트리아 베이스볼리그(ABL) 소속의 세미프로팀 다이빙덕스에 입단하게 됐다.
항상 메이저리그의 꿈을 얘기하던 그는 “이번엔 인생 공부를 하러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야구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과 야구가 어떤 식으로든 미래의 삶에 자양분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최향남은 “이젠 메이저리그가 어렵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인생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열심히 공을 던진 뒤 시즌이 끝나면 도미니칸 윈터리그에 가서 스카우트의 눈도장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은 1%가 안 된다. 그래도 인생에 목표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는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인생이 그랬다. 어깨 부상으로 2003시즌 뒤 LG에서 방출됐을 때 그가 재기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해외 진출’이라는 오랜 꿈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
뜻이 있으니 길이 보였다. 그는 수차례 테스트 끝에 마침내 2006년 트리플A 버펄로에서 뛸 수 있게 됐다. 2007년과 2008년 한국 프로야구 롯데로 복귀했다가 2009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트리플A 앨버커키에서 뛰며 9승 2패, 평균자책점 2.34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게 흥미롭고,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살았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했으니 전혀 후회는 없다. 운명은 하늘에서 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메이저리그가 아닌 새로운 목표를 갖고 있다. 바로 완벽한 투구 밸런스다. 어떤 몸 상태, 어떤 경기 상황에 마운드에 올라가도 자기의 공을 던질 수 있느냐가 그의 새로운 화두다. 자기를 시험하기 위해선 경기에 나가야 한다. 메이저리그이건, 한국 프로야구이건, 오스트리아이건 마운드에 오를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
한 시즌에 20여 경기를 치르는 오스트리아 세미프로 리그는 한국 고등학교 야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최향남은 “지난달 30일 연습경기에 등판해 1이닝을 던졌는데 안타 2개를 맞고 1점을 내줬다. 시차 적응도 안 됐고, 준비도 완전치 않았지만 결국은 내가 모자란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쉬운 야구는 없다. 여기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이곳까지 온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야구를 찾기 위한 그의 수행(修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