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클리어링이 또 벌어졌다. 12일 사직구장에서 한화와 롯데가 정면충돌했다. 단어 그대로, 양 팀 선수들이 모두 덕아웃을 깨끗이 비우고 그라운드로 달려 나왔다. 롯데 황재균에게 한화 이동걸이 던진 몸쪽 공 3개와 사구가 원인이었다. 승부의 세계를 지탱해온 팽팽한 기싸움이 ‘날것’ 그대로 펼쳐지는 몸싸움의 현장.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고, 누군가는 ‘필요악’이라고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라운드로 달려 나오게 만들까.
큰 점수차 도루·사인 훔치기·과도한 세리머니 등 불문율 깰 때 빈볼로 응징…벤치 클리어링 촉발 팀워크 다지는 효과도…메이저리그선 격투 방불
● 원인
사실 우발적인 벤치 클리어링은 거의 없다. 투수 A는 “분명히 전조 증상이 있다. 우리가 보복해야 하거나 보복을 당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느끼고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며 “뜬금없이 선수 하나가 맞았다고 해서 뛰어 나가는 게 아니다. 그 전부터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귀띔했다. 공이 타자의 몸으로 날아가기 무섭게 덕아웃의 선수들이 총알같이 튀어 오르며 즉각 반응하는 이유다. 특히 벤치에서 이미 빈볼을 주문해놓은 상황이라면 준비태세는 더 확실해진다. 타자 B는 “주로 투수코치나 팀 내 베테랑 투수가 후배에게 지시한다”며 “같은 선수에게 연타석으로 사구가 나오거나, 한 경기나 한 시리즈(3연전)에서 사구가 너무 많이 나오면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예민해진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상대팀에 ‘좀더 조심하라’는 메시지는 줘야 한다”고 말했다. 시리즈 내내 기회만 살피다 끝났다면, 다음 3연전까지 유예될 수도 있다.
● 효과
초창기 벤치 클리어링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구호로 시작된 프로야구가 어른들의 ‘싸움판’을 재현해선 안 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야구 관계자들은 벤치 클리어링을 경기의 일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오히려 필요할 때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A선수는 “벤치 클리어링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올 때, 암묵적으로 하나가 되는 뿌듯함을 느낀다. 우리 동료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자발적으로 함께 나서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투수 E도 “내가 역전 홈런을 맞고 나서 스스로 흥분을 못 참고 다음 타자를 맞힌 적이 있다. 그냥 내 잘못인데도, 선후배들이 모두 나와서 싸워주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불문율
벤치 클리어링은 대부분 야구의 ‘불문율’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점수차가 크게 벌어졌을 때는 도루를 하지 않는다’, ‘상대의 사인을 훔쳐보지 않는다’, ‘과도한 세리머니는 자제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한 팀이 이 불문율을 위반하면 상대팀이 빈볼을 던지고, 결국 벤치 클리어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롯데와 한화의 12일 충돌도 롯데 황재균의 7점차 도루에서 촉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문율의 기준도 애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5∼6점차 정도면 굳이 도루나 번트로 상대팀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한 현직 감독은 “이제는 모든 팀이 한 이닝 대량득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5회 이전에는 8∼9점차도 안심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물론 보복성 빈볼의 불문율도 존재한다. ‘타자의 머리 쪽으로는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공식적으로는 “내가 일부러 던졌다”고 말하는 투수도, “내가 빈볼을 지시했다”고 털어놓는 지도자도 없다. 빈볼을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 사례
사실 12일의 벤치 클리어링은 수위가 ‘약한’ 축에 속한다. 과거에는 더 격한 충돌도 수차례 빚어졌다. SK와 두산이 맞붙었던 2007년 한국시리즈 때는 3차전에서 두산 김동주가 SK 채병용의 공에 맞아 흥분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자제력을 잃은 김동주는 꽤 오랜 시간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고, 1·2차전을 이겨놓았던 두산은 3차전부터 4연패했다. 2003년 대구구장에선 삼성 라형진이 LG 장재중에게 몸쪽 위협구를 던져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는데, 서로 감정이 쌓였던 삼성 이승엽과 LG 서승화가 멱살잡이를 벌이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승엽은 서승화와의 다음 대결에서 3점홈런을 쳤다.
물론 이 마저도 메이저리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국식 선후배 문화가 없는 메이저리그의 몸싸움은 그야말로 ‘격투’다. LA 다저스 류현진의 팀 동료인 잭 그레인키는 벤치클리어링 도중 쇄골이 부러져 전열을 이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