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방수원의 절규, 송신영의 외침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4월 24일 05시 45분


방수원-송신영(오른쪽). 스포츠동아DB
방수원-송신영(오른쪽). 스포츠동아DB
노히트노런·3200일 만의 선발승 ‘기적’

“그날 날씨가 참 화창했소. 2회를 마친 뒤 내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처럼 덕아웃으로 들어와 스파이크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죠. 그런데 더 던지라고 합디다. 4회 선두타자(김대진)에게 첫 볼넷을 내줬어요. 아니나 다를까, 김응룡 감독이 나오더라고. 바뀔 줄 알았지. 그런데 웬일인지 다시 들어가네? 아마 준비된 투수가 없었나 봅니다. 5회까지 7-0으로 앞섰는데, 6회 선두타자(김정수)를 볼넷으로 내보내니 감독이 또 나오려다 도로 들어가더라고.”

1984년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 삼미전. 그는 그렇게 9회까지 던졌다. 볼넷 3개에 무안타 6탈삼진 무실점 8-0 승리.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노히트노런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방수원(55). 때론 바람잡이 선발로, 때론 패전처리로 프로야구 초창기 해태 마운드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던 숨은 살림꾼. 평소처럼 그날도 2이닝쯤 던질 줄 알고 올라갔던 마운드였지만, 누구도 예상 못한 대역사를 썼다.

2009년 골프 레슨프로로 변신한 그를 만나기 위해 광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그날을 어제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찬란했던 봄날,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노히트노런보다 완투를 해냈다는 게 더 기뻤소. 난 2이닝짜리 투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는 게 더 흥분됐어요.”

그해 1승8패를 기록했으니, 그날의 노히트노런은 그 시즌 그의 유일한 승리였다. 1989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유일한 완봉이자 마지막 완투. 그가 맡은 역할은 노히트노런 이후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이닝이면 1이닝, 2이닝이면 2이닝, 팀이 필요할 때마다 고단하게 마운드에 올라 ‘해태왕조’ 건설에 징검다리가 됐다.

넥센 송신영(38). 그 역시 1999년 프로에 데뷔한 뒤 부지런히 마운드에 올랐다. 빛나지 않은 자리지만, 불펜에서 ‘현대왕조’ 구축의 소금이 됐다. 그러나 그는 히어로즈로, LG로, 한화로, NC로, 그리고 다시 히어로즈로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어느새 ‘저니맨’이 됐다.

지난해 그는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했다. 1이닝은 어떻게 버텼지만, 2이닝째에는 타자들의 방망이를 이겨내지 못했다.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제외되자 공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날아든 뜻밖의 제안. “선발로 전환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염경엽 감독의 의사타진이었다. 처음엔 속으로 ‘2이닝도 힘든데 선발이 되겠느냐’며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다. 2008년 5월 17일 사직 롯데전 이후 7년간이나 선발 경험이 전무한 노장투수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 스프링캠프에서 공 개수를 늘리고, 시즌 개막 후 2군에서 2경기 선발로 나서봤지만 2이닝만 되면 팔에 알이 뱄다.

자신감도 찾기 전에 호출된 1군 마운드. 선발진이 흔들리면서 19일 1군 엔트리에 등록된 그는 곧바로 광주 KIA전에 선발등판했다. 속으로 ‘나만의 퀄리티스타트를 하자’고 다짐했다. 6이닝 3자책점 이하면 방어율 4.50. 4이닝 2자책점도 방어율 4.50. 2이닝도 힘든 그였지만, 그만의 계산법으로 어떻게든 4이닝 2실점으로 버텨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7회 2사 후 최희섭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내려올 때까지 4안타 6탈삼진 1실점의 역투를 펼치며 15-4 승리를 이끌었다. 현대 시절이던 2006년 7월 15일 수원 LG전 이후 무려 3200일만의 선발승. 그는 경기 후 “기적이 일어났다”고 자신을 낮췄다. “3200일만의 선발승보다, 2이닝도 버거웠던 내가 7회 2사까지 던질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프로필상에는 1977년생이지만, 호적이 늦게 신고돼 실제로는 1976년생. 불혹에 찾아온 ‘신영 언니의 봄날’이 눈부시다.

노히트노런, 3200일만의 선발승이라면 우쭐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2이닝짜리 투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데 만족했다. 어찌 보면 소박한 소감이지만, 이는 1이닝, 2이닝을 쉼 없이 던지며 팀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불펜투수들의 작은 절규이자 외침인지 모른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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