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선수에게 등번호는 또 다른 이름이다. 입단할 때 대충 받은 번호가 어느덧 자신을 상징하는 숫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 드는 등번호를 달기 위해 시즌 도중 유니폼 교체까지 감행한다. 한화 김성근 감독은 아예 이름이 아닌 등번호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 단 10명밖에 없는 프로야구 감독들의 유니폼 번호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각 팀 수장의 등번호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류중일·염경엽·이종운 감독 ‘코치시절 번호’ 김성근 감독 38번 ‘광땡’ 뜻하는 행운 숫자 김용희 감독 88번 “팔팔한 야구 하고 싶다” 김기태 감독 77번 “새 팀에서 행운 두배로”
● 류중일 감독은 왜 계속 75번을 쓸까?
선수∼코치∼감독을 거치는 동안 한번도 삼성을 떠나지 않은 류중일 감독은 최근 75번을 달게 된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류 감독은 “처음엔 60번대 번호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70번대는 남는 게 없었고, 80번대는 체격이 큰 코치들이 많이 쓰더라”며 “75번을 달았던 다른 코치가 팀을 떠나면서 그 번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보통 코치에서 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할 때는 새 등번호로 다시 시작하고 싶기 마련. 그러나 류 감독은 “모든 소지품, 심지어 속옷까지 다 ‘75’가 새겨져 있는데 번호를 바꾸면 전부 교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내가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사도 잘 안 간다”고 귀띔했다. ‘변화’를 꺼리는 류 감독의 부임 이후 삼성은 줄곧 우승만 하고 있다.
● 염경엽·이종운 감독 ‘코치 시절 번호 그대로’
코치 시절부터 쓰던 등번호를 그대로 쓰는 감독은 2명 더 있다. 선수 시절 5번을 달았던 넥센 염경엽 감독은 현대에서 은퇴 후 코치가 되면서 ‘5’가 들어간 75번을 선택했다. 이 번호는 LG 시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넥센으로 옮기면서 85번으로 바꾼 뒤 지휘봉까지 잡게 됐다. 염 감독은 “이 번호를 달면서 감독이 됐으니 내게는 좋은 번호인 것 같다”며 번호를 유지했다. 롯데 이종운 감독도 2군 코치로 오면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99번을 받았는데, 감독으로 임명된 뒤에도 그 번호를 고수했다. “선수들 번호도 꽉 차고, 1∼3군 코치들 번호도 꽉 찼는데, 내가 번호를 바꾸면 계속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 같았다”는 배려에서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처음에 72번을 원했지만, 다른 코치가 달았다는 얘기에 “그럼 주인 없는 번호를 달라”고 자청한 케이스. 때마침 김 감독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88번이 남아있어 자연스럽게 그 번호의 주인이 됐다.
● 김성근 감독의 38과 김경문 감독의 74
한화 김성근 감독은 2007년 SK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38’은 화투에서 ‘광땡’을 뜻하는 행운의 숫자. 어느덧 김성근 감독을 상징하는 번호가 됐다. NC 김경문 감독의 74번에는 인생과 야구에 모두 ‘행운(7)’과 ‘불운(4)’이 공존한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김경문 감독이 두산 시절부터 지금까지 11년째 74번을 고수하는 이유다.
SK 김용희 감독은 10여년간 현장을 떠나있다가 만 60세의 나이로 다시 프로야구단 지휘봉을 잡았다. “팔팔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뜻에서 88번을 선택했다. LG 양상문 감독은 지난해 부임하면서 73번을 달았다. 2002∼2003년과 2006년 LG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달았던 번호. LG와의 옛 인연이 등번호로 다시 이어졌다. LG 감독 시절 자신의 프로 데뷔 연도인 91번을 등에 새겼던 KIA 김기태 감독은 올해 새 팀으로 오면서 77번을 골랐다. “행운을 두 배로 받겠다”는 의지다. kt 조범현 감독은 KIA 사령탑 시절부터 달았던 70번을 고수하고 있다. 조 감독은 “KIA 감독으로 취임할 때 당시 간베 도시오 투수코치가 ‘일본에서 70번이 아주 좋은 번호’라며 추천해줬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