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테니스의 세계화는 주원홍 대한테니스협회장(59)을 빼면 얘기하기 힘들다. 그는 지도자로 활동하던 1990년대 초반 당시 중1이던 박성희를 발굴해 사재를 털어가며 가르친 끝에 세계 57위까지 올렸다. 삼성그룹 테니스팀 창단을 이끌어 윤용일 이형택 전미라 조윤정 등을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키웠다. 한국 남녀 테니스의 역대 세계 최고 랭킹과 사상 첫 투어대회 우승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16일 서울오픈이 열린 올림픽코트에서 만난 주 회장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유망주 정현(19)의 등장에 따른 기대감이 커져서다. “한동안 큰 선수가 나오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정)현이가 1년 새 급성장하면서 부흥의 계기가 마련됐다. 껴안아주고 싶다.” 최근 10년 가까이 이렇다할 재목이 나오지 않아 속이 탔던 그로서는 세계 69위까지 이름을 올린 정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주 회장은 정현이 중학생일 때 삼성의 주니어프로그램을 통해 후원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준 인연도 있다.
옥석을 구분하는 비결을 묻자 주 회장은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무조건 공만 세게 친다고 능사는 아니다. 테니스에 맞는 성격이 따로 있다. 우선 남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해야 한다. 가정환경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솔직히 정현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어린 나이에 너무 어른처럼 공을 치려고 했다. 근데 보면 볼수록 뛰어난 신체조건에, 대담한 모습에 ‘이놈 되겠다’ 싶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정현의 전담코치인 윤용일 역시 주 회장이 삼성물산 감독 시절 사제관계였다. “용일이도 중학교 때 처음 봤는데 남다른 재능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용일이와 이형택을 묶어서 키워 보려 했는데 회사 측에서 남자는 가능성이 없다고 다섯 번이나 거절한 끝에 겨우 성사시켰다.” 유망주 발굴을 위해 전국을 발품을 팔며 돌았고 선수들을 어릴 때부터 세세하게 지켜봐 코칭의 기본 자료로 삼은 것도 주효했다.
지도자로서 ‘미다스의 손’이었던 주 회장이지만 정작 본인은 선수 시절 스타와 거리가 멀었다. 국가대표 한번 한 적이 없다. 중2 때인 1969년 친구 따라 테니스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세기 가깝게 코트를 지킬 줄은 몰랐다. “라켓 휘두르는 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성적이 떨어져 부모님 반대가 심해졌다. 학교 앞 라면집에 라켓과 신발을 맡겨두고 몰래 운동을 했다.” 고교시절 복식 전문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문학전집 같은 책을 가까이 뒀다. 대학(성균관대) 학과도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철학과를 선택했다.
주 회장은 1983년 은퇴 후 당시로는 드물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재미교포 의사 집에서 먹고 자며 테니스 레슨으로 학비를 마련하는 고단한 생활에도 유명 테니스 아카데미 과정을 통해 선진 테니스를 익혔다. 또 대회장에 와서도 숙제를 하는 외국 주니어 선수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주 회장이 틈만 나면 하는 얘기가 있다. “지적 능력을 키우지 않는 운동선수는 한계에 부딪친다. 운동선수도 공부하는 풍토를 만드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학생들이 제대로 운동하도록 해야 한다.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행복하고 운동을 잘하면 학생 본인이 행복하다.”
그는 감독 시절 이형택에게 삼국지를 사주기도 했고 정현에게도 영어 공부와 독서를 강조하고 있다. 첫 제자였던 박성희가 뒤늦게 학업의 길을 선택해 영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따자 기자에게 제보하며 기뻐했던 그였다. “한국에선 여전히 운동선수가 훈련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책과 신문만 잘 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래야 은퇴 후에도 새 분야에 잘 적응할 수 있다.”
주 회장의 1남 1녀는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운동한 사람 자식이 공부를 잘해 주위에서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애들에게도 늘 운동을 즐기게 했다”며 웃었다.
30년 전인 1985년 동아일보는 역대 최연소 테니스감독 탄생의 소식을 전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제일생명 사령탑을 맡게 된 20대의 그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요즘도 그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늘 설레는 마음으로 뭔가에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 후배들과 소통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 꿈나무 육성 재원 마련과 테니스 관련 일자리 창출, 인프라 개선 등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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