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김경언이 17일 대전 넥센전에서 5-6으로 뒤진 9회말 동점 솔로홈런을 친 뒤 덕아웃에서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이날 경기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극적인 승부였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야구가 오묘한 이유는 한 경기를 놓고 관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2015시즌 초반 가장 극적인 경기를 꼽으라면 17일 대전에서 벌어졌던 넥센-한화전도 들어갈 듯하다. 이 경기는 미국인들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USA투데이 인터넷판이 19일(한국시간) ‘제 정신이 아닌 작전이 거의 통할 뻔했다’는 내용으로 넥센-한화전을 다뤘다. ‘제 정신이 아닌’이라는 표현에서 메이저리그식 사고방식이 짐작된다. 물론 한화 김성근 감독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는 ‘불경스러운’ 표현이다. 그날 오직 김성근 감독 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작전으로 다졌던 경기를 뒤집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정상과 창조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이날 경기는 7개 대목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다.
1. 심판 보크 편차 노린 김성근의 어필
● 2회말 김성근 감독의 어필
김성근 감독은 넥센 선발투수 라이언 피어밴드의 견제 동작을 보고 “보크가 아니나”며 어필했다. 이후 심판은 피어밴드의 1루 견제 때 2차례 보크 판정을 내렸다. 피어밴드는 첫 번째 보크 판정 이후 보란 듯이 같은 동작으로 또 견제했고, 심판은 또 보크라고 했다. 물론 김 감독이 나오기 전에는 누구도 보크라고 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는 복선이 깔려있다.
10일 잠실 두산전에서 한화 미치 탈보트는 보크 판정 직후 글러브를 하늘로 던져 퇴장 당했다. 그때 김 감독이 어필했지만, 심판들은 탈보트의 투구 동작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김 감독은 순순히 물러나면서 “심판이 보크라고 하면 보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베테랑 감독은 일주일 뒤 넥센전에서 비슷한 상황이 나오자 또 어필했고, 원했던 결과를 얻었다. 심판 전체의 보크 판정 기준이 다르고, 개인마다 편차도 크다는 점을 알기에 벼르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2. 안영명 주 3회 선발경기 한화 모두 승리
● 선발 안영명의 조기 강판
한화 투수 안영명은 12일과 14일 대구 삼성전에 이어 17일 넥센전까지 일주일에 3차례 선발로 나섰다. 17일 2.1이닝 만에 강판된 것을 포함해 모두 초반에 내려왔다. 메이저리그의 시각에서 보자면 미친 짓이고, 김성근 감독의 편이라면 선발진에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찾아낸 한화만의 방법이라고 여길 것이다. 결과는 안영명이 선발등판한 경기에서 한화가 모두 이겼다. 3. 승리 위해선 포수까지 자극하는 김성근
● 3회초 주전 포수 조인성의 교체
한화 조인성은 사흘 연속 중간에 교체됐다. 투수 리드에 불만이 있음을 보여준 김성근 감독의 결정이다. ‘감독은 경기 초반 내야 수비라인을 주무르면 안 된다’는 메이저리그의 격언이 있다. 현장감독인 포수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베테랑 감독은 이를 어겼다. 조인성에게 볼 배합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공부하라는 신호이자, 이기기 위해선 이닝과 관계없이 과감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조치다.
4. 적극적 공격으로 나타난 이용규의 번트
● 4-6으로 2점 뒤진 8회말 무사 1루서 나온 송주호의 보내기번트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일 수도 있다. 막판이지만 1점이라도 따라가 상대에게 압박을 주면 뒤집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해석한다면 무시무시한 한 수다. 결국 1사 2루서 이용규의 번트 안타 때 2루주자 강경학이 득점했다. 넥센 수비의 빈 곳을 노린 이용규의 푸시번트와 과감하게 홈까지 내달린 강경학의 발이 한국야구의 높아진 수준을 보여줬다. 이 장면을 보면 번트는 결코 소극적 공격이 아니다. 가장 적극적 공격이다.
5. 빅리그 금기 무색케 만든 특타의 결과론
● 9회말 김경언의 동점 홈런
홈런보다는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김성근 감독은 15∼16일 야간경기 후 부진한 타자들을 모아 특타를 했다. 수비 실수를 범했던 2루수 정근우도 같은 경험을 했다. 3일 대전 롯데전 이후 관중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김 감독은 직접 펑고 배트를 들었다. 대전 관중은 그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한화 팬들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기 후 특별훈련은 메이저리그 상식으로는 금기다. 더욱이 관중이 보는 상태라면 문제가 된다. 선수들의 자존심을 뭉개고 피곤한 그들에게 나쁜 습관을 배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일 특타까지 소화했던 정근우는 이틀 뒤 만루홈런을 터트렸다. 15일 특타를 한 김경언도 이틀 뒤 9회말 극적인 동점홈런을 날렸다. 적어도 결과에서만큼은 메이저리그의 금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6. 투수가 타석에 설 만큼 14명 야수 소진
● 6-6으로 맞선 9회말 2사 만루서 투수 권혁의 타격
USA투데이는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날 한화는 엔트리에 있는 14명의 야수를 모두 출전시켜 9회말 권혁 타석에서 대타로 나갈 선수가 없었다. 또 하나 김성근 감독은 9회말 득점이 나지 않을 경우까지 생각했다. 참고로 그날 권혁은 10초 이내에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규정을 어겨 벌금 20만원을 받았다.
7. 염감독, 10회에 꺼내든 초짜 배힘찬 카드
● 연장 10회말 넥센 염경엽 감독의 투수 교체
사흘 연속 등판한 마무리 손승락이 동점을 허용하자 염경엽 감독은 10회말 배힘찬으로 교체했다. 배힘찬의 올 시즌 1군 2번째 등판이었다. 누구는 “감독이 경기를 포기했다”고 봤고, 누구는 “다음을 생각하는 놀라운 용기”라고 했다. 내일이 있는 야구와 오늘에 모든 것을 거는 야구가 충돌했다. 이 한 경기의 승패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시즌 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