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토피아] 그라운드에 얼씬도 않는 오 사다하루 회장의 교훈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7월 6일 05시 45분


소프트뱅크 오 사다하루 회장은 현역 시절 868홈런을 기록한 일본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지금도 유니폼을 입은 선수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라운드를 밟지 않고 덕아웃 뒤 복도에 직원들과 도열해 선수들을 격려한다.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소프트뱅크 오 사다하루 회장은 현역 시절 868홈런을 기록한 일본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지금도 유니폼을 입은 선수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라운드를 밟지 않고 덕아웃 뒤 복도에 직원들과 도열해 선수들을 격려한다.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 그라운드 존중하는 일본야구문화

오 회장, 덕아웃 통로서 선수 기다린 후 격려
아마선수 영입 때 수업 종료까지 기다리기도
김응룡 전 감독, 프런트 시절 현장 존중 실천

요즘 우리 사회에선 민주적 리더십이 뜨거운 키워드다. 어떤 위치에서든 상대를 존중하고, 그가 맡은 역할을 인정해줘야 하늘과 땅 만큼이나 벌어진 괴리감을 줄일 수 있겠지만, 생각만큼 행동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대호가 활약하는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의 최근 경기. 스쳐지나가는 현지 방송사의 화면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엿보였다. 선수단이 경기 후 덕아웃 뒤의 통로로 나오는데, 오 사다하루(왕정치) 소프트뱅크 회장이 보였다. 구단 사장을 비롯한 프런트가 일렬로 도열했다. 구도 기미야쓰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덕아웃 통로 옆에 대기하던 이들은 선수단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일본프로야구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 덕아웃 밖에서 까마득한 후배 감독과 선수들을 기다린다는 점과 그 장소가 덕아웃 뒤의 통로라는 점이 신선했다.

● 왜 오 사다하루는 그라운드에 들어가지 않나?


1996년 선동열 취재를 위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취재 카드를 신청했을 때다. 구단 홍보 담당자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미안하다”며 먼저 양해부터 구했다. “한국프로야구의 환경과는 달리 일본은 경기장에서 규제가 많다. 이런 것들에 대해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처럼 일본의 야구장에는 취재진이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가 많았다. 라커룸은 물론 그라운드도 일정 수준 이상은 취재진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쳤지만, 이들은 라인 밖의 덕아웃에서 기다렸다. 일본프로야구의 취재 룰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이동할 때는 그라운드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지나가는 선수를 멈추게 해선 안 되고 멈춰주지도 않는다”고 어느 일본 기자가 귀띔해줬다. 유일하게 배팅케이지 가까이나 그라운드 안으로 접근이 허락된 사람도 있었다. 선수 출신 해설가였다. “야구인끼리 상부상조하는 시스템이 있어서 선수 출신에게만은 편의를 봐준다”고 설명했다. 야구하는 사람들만의 독특한 카르텔 정도로만 이해했지만, 오 회장의 행동을 보면서 더 깊은 뜻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라운드와 유니폼에 대한 일본프로야구의 존중 문화다.

● 그라운드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신성한 일터!

일본프로야구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철저하리만치 예우한다. 유명 감독이나 스타 선수의 발언은 마치 종교 지도자의 그것처럼 다룬다. 어떤 주제에 대해 항상 그들의 의견을 묻고 진지하게 듣는다.

일본인들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시선이 깔려있기에 현장과 그라운드를 향한 존중 정신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오 사다하루 회장의 행동이 바로 현장존중 정신의 표현이다. 그라운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고, 그 밖의 사람은 얼씬해선 안 된다는 것을 오 회장과 소프트뱅크 프런트가 보여줬다.

호시노 센이치 전 감독은 “야구인들에게 유니폼은 군복이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전쟁은 시작되고 그라운드는 전쟁터”라고 말했다. 그라운드는 야구선수들의 신성한 직장이고 일터다. 그 일터를 존중하는 것은 프로야구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본정신인 것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이를 잘 보여준 사람은 김응룡 전 감독이다. 삼성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훈련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비록 제자(선동열)에게 자리를 물려줬지만, 현장은 감독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지닌 프런트가 국내에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야구계에 있다보면 자기 감독의 작전에 불만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프런트를 의외로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이 야구를 보는 시각은 뛰어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문제다. 관중의 수준에서, 야구가 아니라 결과만 본다. 한 경기를 치르기 위해 감독과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모든 것을 거는지 그 이면을 보지 못하면서 오직 결과에만 분노한다.

●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아는 일본의 야구문화

존경받는 일본의 야구인들도 대접 받은 만큼 다른 사회를 존중한다.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1998년 프로 지명을 받았을 때다. 당시 세이부, 요코하마, 니혼햄 등 3개 구단이 탐내던 마쓰자카는 고향팀 요코하마를 원했다. 지명 1순위로 교섭권을 획득한 세이부는 마쓰자카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스카우트 책임자와 단장은 마음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업 중에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다”며 학교가 막았다. 이들은 정문에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교장실을 찾아가 방문 용건을 밝힌 뒤에야 마쓰자카를 만날 수 있었다.

다이에가 포수 조지마 겐지를 드래프트했을 때도 그랬다. 조지마는 요미우리 입단을 꿈꾸며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지만, 다이에는 드래프트 결심을 숨기지 않았다. 아마추어야구계의 반발을 두려워한 일본프로야구 커미셔너 사무국에서 경고했지만, 다이에는 조지마가 어릴 때 우상으로 삼았던 오 사다하루를 내세워 마음을 돌렸다. 당시 다이에 차기 사령탑으로 내정된 오 사다하루는 조지마를 설득하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그 때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에야 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선수가 내뱉은 발언을 번복할 명분을 주고, 입단을 아름다운 스토리로 포장한 일본프로야구의 지혜 속에는 학교와 아마야구 존중의 정신이 숨어있었다. 내가 대접받고 싶으면 그만큼 상대도 존중해줘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법이다.

● 과거에는 좌충우돌했던 프런트,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대세다!

KBO리그 초창기에는 현장과 프런트의 알력이 대단했다. 감독과 사장이 구단주 앞에서 “누가 더 계급이 높으냐”고 물어볼 정도로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빚어졌다. 어느 사장은 감독이 옆에 있는데 타격코치를 따로 불러 “선수들에게 빗맞은 안타를 치도록 가르치라”로 지시했다. 김성근 감독의 경우 과거 모 팀 사장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 중도퇴진을 당하기도 했다. 어느 팀에선 감독과 사장의 감정대립이 격화돼 멱살잡이까지 했다. 서로를 존중하지 않아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지금도 가끔 좌충우돌과 우격다짐이 보이기는 한다. 프로야구를 처음 경험하는 소수의 프런트가 황당한 행동으로 만든 해프닝일 때가 많다. 어느 정도 프로야구의 시스템을 알고 나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상호존중의 정신이 정착돼가는 듯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최근 어느 팀이 방송 화면에 비치는 감독의 얼굴 표정에 대해 조언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팀 성적이 기대치보다 못한 상황에서 감독이 덕아웃에서 어떤 행동과 표정을 했는지까지 모니터링할 정도라면 그 팀의 속사정을 알 것 같다. 프런트가 현장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선수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팀워크의 와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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