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 장거리 경주에서 일정 속도를 유지하면서 무사히 레이스를 마칠 수 있도록 돕는 선수를 말한다. 올 시즌 명실상부한 두산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좌완투수 유희관(29)에게도 훌륭한 페이스메이커가 하나도 아닌 둘이나 존재한다. NC 용병투수 에릭 해커와 삼성 용병투수 알프레도 피가로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피가로가 유희관의 호적수였다. 7월초까지 올 시즌 다승왕 후보는 유희관과 피가로로 좁혀지는 듯했다. 시즌 반환점을 돈 시점에 나란히 11승을 올리면서 동반 20승 도전에 대한 꿈을 부풀렸다. 오른손 외국인 강속구투수인 피가로와 왼손 토종 제구력투수인 유희관의 대결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했다. 둘은 하루 간격으로 로테이션을 지켰고, 피가로가 1승을 따내 한 발 앞선 뒤 다음날 유희관이 1승을 추가해 곧바로 균형을 맞추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그러나 유희관이 계속해서 피치를 올리는 사이, 피가로는 승운이 따르지 않아 멈칫했다. 유희관이 성큼성큼 달아나 먼저 15승 고지를 밟는 동안, 12승에 머문 채 좀처럼 승수를 추가하지 못했다. 유희관의 독주 태세가 열리는 듯했다.
이때 유희관에게도 쉼표가 닥쳤다. 15번째 승리를 수확한 뒤 훈련 도중 발목을 삐었다. 열흘간 1군 엔트리에서 제외돼 숨을 골랐다. 그 사이 무서운 상승세로 뒤쫓은 투수가 바로 해커다.
해커는 8월에만 무려 5승을 쌓아 올리며 팀의 승승장구를 이끌었다. 돌아온 유희관이 22일 수원 kt전에서 패전을 안은 반면, 해커는 27일 마산 한화전에서 화제의 상대 용병 에스밀 로저스에게 첫 패를 안기면서 시즌 16승 고지까지 순식간에 밟았다. 유희관이 10승 달성 이후 처음으로 다승 1위 자리를 내준 순간이었다.
그러나 2위에 머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희관은 이틀 뒤인 29일 잠실 한화전에서 8이닝 6안타 2볼넷 8탈삼진 1실점으로 역투하며 다시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섰다. 이날의 투구수 120개는 올 시즌 최다. 팀과 자신을 동시에 웃게 만든 투혼이었다.
여전히 유희관은 다승왕과 20승에 도전한다. 다만 옆을 보며 함께 달리는 상대가 전반기의 피가로에서 후반기의 해커로 바뀌었을 뿐이다. 유희관은 “해커는 정말 좋은 선수다. 많이 배우고 있다”면서도 “해커와의 경쟁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매 경기 내가 상대하는 팀들과 잘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유희관이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면, 상대팀뿐만 아니라 해커와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 과연 유희관과 해커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누가 더 앞에서 달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