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락(伯樂)은 춘추시대 유명한 말(馬) 감정가였다. 말의 상(相)만 보고 천리마인지 보통 말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하루는 소금 수레를 끌고 가는 초라한 말이 천리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입고 있던 베옷을 덮어 줬다. 그러자 말이 감격해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 냈다고 한다.
박경수는 천리마 혈통이었다. 성남고 시절 ‘초고교급’ 내야수였다. 두산이 그를 잡기 위해 3억8000만 원을 제시하자 서울 라이벌 LG가 5000만 원을 더 얹어 4억3000만 원에 스카우트했다. 이 금액은 지금도 고졸 신인 내야수 최고 계약금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박경수는 단 한 번도 천리를 달리지 못했다. ‘거포 내야수’라는 기대와 달리 2003년 입단 후 10년 동안 홈런은 43개로, 한 해 평균 4개 정도에 그쳤다. 한 시즌 최다 홈런도 8개에 불과했다. 타율도 2할대 중반이 고작이었다. 해가 갈수록 기대가 줄면서 어느새 소금 수레를 끄는 초라한 말로 전락했다. 지난해 말 자유계약(FA) 협상 때 LG가 손을 흔든 건 예고된 순서였다.
kt 조범현 감독은 그런 박경수에게 베옷을 덮어 줬다. 비루먹어 비실거리는 말이 FA 시장에 나오자 지체 없이 사들였다. 남다른 유전자(DNA)를 본 것이다.
“홈런 스무 개는 쳐야 한다.” 조 감독이 박경수를 불러 놓고 다짜고짜 한 말이다. 박경수는 놀랐다. 늘 신중한 조 감독은 어쩐 일인지 언론을 통해 홈런 20개를 장담했다. 이번에는 팬들이 놀랐다. 박경수는 올 시즌 홈런 21개(2일 현재)를 터뜨리며 이미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10년 동안 친 홈런의 절반을 한 해에 몰아쳤다. 생애 첫 3할 타율도 가능성이 높고 장타력 5할도 예약해 둔 상태다.
물론 그냥 달라진 건 아니다. 천리마는 한 번에 곡식 한 섬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마부가 이를 모르고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평범한 말만도 못하다. 조 감독은 박경수에게 천리를 달릴 수 있는 한 섬짜리 원 포인트 레슨을 해 줬다. ‘히팅 포인트’를 교정한 것이다. 히팅 포인트는 배트와 공이 만나는 지점이다. 홈런 잘 치는 선수들의 히팅 포인트는 대부분 비슷하다. 오른손 타자라면 왼쪽 다리 부근에서 형성된다. 그곳에서 때려야 홈런이 나온다. 그런데 박경수는 그보다 한참 뒤에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경수는 LG 시절 작전 수행이 많았다. ‘치고 달리기’ 등의 작전 상황 때 변화구에 헛스윙하는 건 죄악이었다. 어떻게든 공을 맞혀야 했다. 그래서 최대한 공을 오래 보고 스윙하다 보니, 히팅 포인트가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맞히는 데 급급한 10년 세월이었다.
전지훈련 때의 교정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4, 5월 실전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도로 예전 폼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조 감독은 확신을 갖고 기용했다. 그가 타석에 설 때면 작전을 삼가며 온전히 자기 스윙을 하도록 했다. 결국 6월부터 한꺼번에 터졌고 서른하나에 첫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당나라 대문호 한퇴지는 “천리마는 늘 있으나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은 늘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만큼 선수의 능력과 재능을 알아보고 적소에 쓰는 문제는 어렵다. 하지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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