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왕 한국전력 자재검사처에 있는 한국전력 빅스톰의 훈련장. 다른 팀에 비해 훈련장 시설이 낡았다. 천장 높이가 낮아서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어도 연습경기를 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래서 프로팀과의 연습경기는 가능한 한 원정으로 치른다. 선수들만의 공간인 라커룸도 좁다. 웨이트트레이닝 시설 가운데는 대중사우나에서 보던 일반인용 시설도 섞여 있다. 그나마 몇몇은 고장으로 쓰지 못한다. 훈련장 스탠드 구석에는 선수들의 유니폼과 양말, 수건이 널린 세탁건조대가 보였다.
지난 시즌 진달래가 필 때까지 배구를 했던 빅스톰 선수들이 처한 환경은 풍족한 지원을 해주는 다른 기업팀들과는 차이가 난다. 그나마 지금은 훈련장 부근에 식당도, 휴식공간도 생겼다. 선수들은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밥 먹고, 훈련 뒤에는 잠시 눈도 붙인다. 숙소는 훈련장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나면 아파트로 돌아가서 쉬거나, 이동이 불편한 선수들은 좁은 공간에서 잠시 휴식한다. 그래서 한국전력은 다른 팀들보다 오후 훈련 시작시간이 조금 늦다. 지원은 풍족하지 않지만, 선수들은 열심히 배구를 하며 승리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한국전력 선수들은 진짜 프로다.
● 신영철 감독과 선수들의 대화, 배구는 각도다!
V리그 사령탑들 가운데 드문 박사학위 보유자인 신영철 한국전력 감독은 이론가다. 대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10월 10일 개막하는 새 시즌을 앞두고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주로 신 감독이 묻고 선수들은 대답했다.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외국인선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 감독이 선수들에게 자주 질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몸으로 익히기에 앞서 머리로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이해가 훈련 효과를 높인다고 믿는다. 지난 시즌 세터 권준형은 신 감독과의 1대1 문답 교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번 시즌에는 모든 선수들에게로 확대됐다.
몸보다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생각하는 배구. 새 시즌 한국전력이 추구하는 배구다. 신 감독은 “선수들 대부분은 어떤 지시를 받으면 다 안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배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다음과 그 다음의 플레이를 예측해야 좋다. 그래야 상대보다 한 박자 빨리 움직일 수 있다. 이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선수들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인시켜야 모르고 있던 선수도 알게 된다. 그래서 배구는 센스가 필요한 경기”라고 말했다.
요즘 많은 팀들이 스피드를 화두로 내세우지만 신 감독은 ‘각도’를 말했다. 그는 “배구는 좋은 각도에서 공격하고 수비해야 득점하고, 실점을 막을 확률이 커진다. 그 각도를 위해 움직이려고 훈련한다”고 밝혔다. 세터는 상대 블로커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쉬운 공격 각도가 나오도록 토스해야 한다. 공격수는 때리기 편한 각도와 빈 공간을 생각한 공격을 해야 한다. 수비와 어택, 블로킹 커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팀의 공격과 블로킹이 만들어내는 각도를 생각하고 공의 방향을 예측해 움직여야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 올 시즌 한국전력의 배구는 ‘예측’과 ‘각도’라는 관점에서 볼거리가 많을 듯하다.
● 감독의 존중과 선수들의 책임
신영철 감독은 선수들을 존중한다. 그는 “프로선수로서 자기가 맡은 일만 하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해도 좋다”고 얘기한다. 훈련 일정도 사전에 알려주고 가능한 한 바꾸지 않는다. 신 감독은 “선수들도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다. 일정을 미리 알아야 친구도 만나고 집안일도 할 것이다. 그래서 미리 외출이나 외박 날짜를 정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대로 지키다”고 설명했다.
신 감독은 “열심히 자기 일을 잘 하는 선수는 존중해주지만, 그 책임도 확실히 지게 한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팀에 큰 도움을 줬던 쥬리치와 결별하고, 얀 스토크를 택한 것도 존중과 책임 때문이었다. 쥬리치는 뛰어난 선수지만 게을렀다. 자신을 위해 다른 선수들이 희생한다는 사실에 크게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지난 시즌 한국전력은 상대 외국인선수의 마크를 전광인에게 전담시켰다. 쥬리치에게는 블로킹이 낮은 국내선수를 매치업시켰다. 쥬리치의 득점 확률을 높여 팀의 승리를 이끌기 위한 신 감독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전광인의 부담이 컸다. 그러나 감독이 존중해주는 만큼 쥬리치는 책임지기 싫어했다. 신 감독은 “이런 선수와 오래 있으면 팀 분위기가 흐려진다”고 판단했고, 결국 인연을 끊었다. 41세의 후인정이 최고령 선수로서 한 시즌을 더 연장하게 된 것도 훈련에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키 205cm, 몸무게 113kg의 탄탄한 체격을 갖추고 최근 2시즌 연속 러시아리그에서 득점왕도 거머쥐었던 체코국가대표 출신 얀 스토크는 책임과 성실성이라는 면에서 신 감독과 코드가 잘 맞는다. 신 감독은 “훈련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훈련을 대하는 태도 또한 성실하다”고 평가했다. 공격 기술과 파워 등에서 쥬리치와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
신 감독은 팀의 최고연봉선수가 된 전광인에게는 에이스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했다. 전광인은 왼 무릎 연골 이상으로 팀 훈련에 거의 참가하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국가대표팀에 고정으로 차출된 후유증이다. 신 감독은 훈련을 거른 채 경기에만 출전하면 그동안 열심히 훈련해온 선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책임감을 강조했다. 신 감독은 전광인에게 “앞장서서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라. 네 호주머니도 열어서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라”라고 당부했다.
전광인은 재활하는 동안 상체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무릎을 제외하고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좋은 몸 상태를 보이고 있다. 무릎 통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점프는 삼가고 있지만, 수비 등 다른 동작에는 이상이 없다. 실전감각을 높이기 위해 가끔 연습경기 때 리베로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다. 점프는 수영장에서 하고 있다. 부력을 이용해 무릎의 하중을 줄이기 위해서다. 추석 직전 현대캐피탈과 치른 연습경기에 잠깐 출장했다. 그러나 착지하다 무릎에 이상이 생겨 다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개막전 출전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 시즌 전술 구상과 달라진 팀플레이
한국전력은 한때 불미스러운 일로 많은 주축선수들이 배구를 못하게 돼 팀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 때도 있었다. 다행히 신인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권을 확보한 덕분에 좋은 선수들을 많이 뽑았다. 현재 팀의 주축선수들로 성장했다. 국가대표 고정 멤버 서재덕, 전광인, 오재성 외에 세터 권준형과 박성률까지 공교롭게도 모두 성균관대 동문이다. 대학에서부터 줄곧 호흡을 맞춰온 만큼 수비와 공격에서 이들의 연결 플레이는 매끄럽다.
한국전력의 날개 공격은 대한항공과 함께 가장 위협적이다. 전광인의 출장이 불투명할 경우 주상용이 리시브에서 많은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 서재덕, 오재성, 전광인, 주상용이 수비와 리시브의 중심이다. 여기서 버텨줘야 공격력도 살아난다. 최근 결혼한 새 신랑 서재덕은 신혼여행도 미루고 팀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아직 허리가 완전하지 않다.
센터 하경민의 공백은 1일 열리는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보완해야 한다. 대안으로 대한항공에서 권혁모를 영입했다. 최석기를 중심으로 방신봉 등이 어느 정도 버텨주느냐가 관건이다. 추석연휴 전까지 6차례 연습경기를 소화했다. 현대캐피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기지 못했다. 시즌 개막 이전까지 남은 3번의 연습경기는 승리를 목표로 한다.
● 키플레이어 권준형
한국전력의 시즌 성패는 권준형이 쥐고 있다. 지난 시즌 명 세터 출신 신영철 감독으로부터 매일 과외수업을 받으며 실력이 부쩍 늘었다. 가끔은 감독의 지시와 정반대의 토스를 해서 혼도 났지만, 세터는 무수한 실전과 실수를 통해 배우는 포지션이다. 신 감독은 “지난해보다 안정적이다. 위기상황에서 흔들리는 단점도 많이 줄었다. 특히 수비가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물론 아직은 나쁜 리시브가 왔을 때 이를 컨트롤하는 능력에서 아쉬움이 있다. 연습경기를 통해 얀 스토크와의 호흡도 합격점을 받았다. 김 감독은 “얀은 제 수치를 할 것이다. 권준형은 낮고 빠른 토스보다는 높은 토스에 강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호흡이 괜찮다. 얀은 60∼70% 정도 한국배구에 적응했다”고 내다봤다.
“상대팀 따라 맞춤형 전략…플레이오프 진출 노린다”
■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 출사표
라운드를 치러가면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낸 뒤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의 전력이 상대를 압도하진 못하지만, 경기를 하다 보면 팀마다 약점은 드러난다.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다. 상대의 플레이 패턴에 따른 맞춤형 전략과 선수기용을 통해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겠다. 팀을 이끌어가는 원칙은 열정과 신뢰, 책임감, 그리고 역지사지다. 선수들은 열정을 다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코트에서는 물론 숙소나 훈련 때도 서로를 신뢰해야 팀워크와 조직력이 생긴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모두 가진다면 봄에도 배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