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9호]
FIFA 윤리위, 비밀유지 의무 위반 문제 삼아 6년 자격정지 결정
‘세계 축구 대통령’을 향한 정몽준(64)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겸 국제축구연맹(FIFA) 명예부회장의 도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10월 8일 FIFA 윤리위원회는 비밀유지 의무 위반 등을 이유로 정 명예회장에게 자격정지 6년과 벌금 10만 스위스프랑(약 1억1600만 원) 처분을 내렸다.
FIFA의 새 수장을 뽑는 회장선거는 내년 2월 26일 치르고, 후보 등록은 10월 26일까지다. 윤리위원회 결정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이미 출마를 선언한 정 명예회장은 원천적으로 후보 등록은 물론, 축구와 관련한 활동을 일절 할 수 없는 ‘축구계 정치적 사망자’가 된다. FIFA를 개혁하겠다며 야심 차게 대권을 노린 정 명예회장은 그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한 조제프 블라터 FIFA 회장과 유력 경쟁자 중 한 명인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의 ‘연합전선’에 막혀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좌초할 위기에 빠졌다. “마피아에 대한 모욕”
7월 리처드 블루멘설 미국 상원의원은 미국축구협회 청문회에서 “FIFA를 마피아에 비유하는 것은 마피아에 대한 모욕이다. 마피아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했다. FIFA의 비합리적 의사결정 구조와 부패 고리를 묘사한 이 말은 이후 FIFA의 부정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됐다.
FIFA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버금가는 위상을 자랑하는 국제스포츠단체다. 4년마다 개최하는 단일 종목 세계 최대 이벤트인 월드컵축구대회(월드컵)를 통해 다양한 스폰서 유치와 TV 중계권, 마케팅 활동 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다. 산하에 209개 회원국을 둔 세계 최대 스포츠 조직이지만, 월드컵 개최지 선정 등을 비롯한 중요한 의사결정은 회장을 포함한 집행위원 25명으로 구성된 ‘FIFA 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한다. 밀실에서 진행되는 집행위원회의 논의 과정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다. 집행위원회는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는 회장과 그를 추종하는 일부 인사의 뜻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일쑤다. 그런 만큼 부정과 부패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FIFA 회장은 돈·명예·권력을 한 손에 쥔 ‘제왕적 존재’에 가깝다. 검은돈 거래와 관련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비영리단체인 FIFA는 외부 감시 없이 한 해 예산 2조5000억 원을 운용한다. 내부 감사 기능도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FIFA에서 검찰 노릇을 해야 하는 곳이 바로 정 명예회장에게 6년 자격정지를 명한 윤리위원회다. 공정하고 엄중해야 할 윤리위원회는 외견상 ‘독립적 기구’ 성격을 띠고 있지만 블라터 회장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FIFA 윤리위원회는 당초 정 명예회장이 2022년 월드컵 한국 유치를 추진하며 ‘축구발전기금을 조성해 저개발국을 지원하겠다’는 서한을 각국 축구협회에 보낸 2010년 일을 뒤늦게 문제 삼았다. 뇌물 공여 의도라는 전형적인 ‘부풀리기 식’ 죄를 덮어씌워 자격정지 19년을 매기려 했다. 그러나 명확한 설명 없이 이 죗값(?)은 묻지 않은 채 비밀유지 의무 위반 같은 모호한 내용을 문제 삼아 6년 자격정지와 벌금을 결정했다.
FIFA 윤리위원회는 정 명예회장에게 이해할 수 없는 중징계를 내리면서 뇌물수수 의혹으로 사의를 표명한 뒤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블라터 회장과 블라터 회장으로부터 200만 스위스프랑(약 24억 원)을 받은 혐의로 스위스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플라티니 회장에겐 각각 자격정지 90일 처분을 내렸다. 뇌물수수 등으로 국제적으로 망신을 산 블라터 회장과 그의 정치적 동반자인 플라티니 회장에게 이 같은 경미한 처분을 내린 것은 정 명예회장에게 내린 중징계에 구색을 맞추려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두 사람 역시 정 명예회장처럼 윤리위원회 결정에 반발하고 있지만,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일 뿐이다.
FIFA 윤리위원회의 이 같은 일련의 결정은 ‘친(親)블라터 인사’로 구성된 윤리위원회가 블라터 회장의 사조직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윤리위원회는 블라터 회장의 살인청부업자”라고 표현했다. 윤리위원회는 2011년 회장선거 때 ‘반(反) 블라터 진영’에 섰던 무함마드 빈 함맘 전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에게 영구 제명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례도 있다.
‘무소불위 권력자’로 불리는 블라터 회장은 1998년 선거에서 당시 유력 후보였던 렌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을 꺾고 FIFA 수장에 올랐다. 직업군인 출신으로 시계회사 론진 회장, 스위스 아이스하키연맹 회장을 거쳐 75년 FIFA 기술위원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은 블라터는 사무총장에 이어 회장에 취임한 뒤 돈을 통해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었고, 올해 5월 5선에 성공하는 등 17년간 세계 축구를 쥐락펴락했다. 연이은 비리 의혹에 6월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며 한발 물러서는 듯했지만 이는 ‘할리우드 액션’에 지나지 않았다. 블라터 회장은 이번 윤리위원회의 90일 제재가 끝난 뒤 내년 2월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를 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 다시 회장직을 맡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 정 명예회장 측 분석이다. 달걀로 바위 치기?
2011년 FIFA 부회장 5선에 도전했다 좌절을 맛본 정 명예회장은 이후 줄기차게 FIFA 개혁을 요구했다. 5월 선거 때도 성명을 내고 ‘반 블라터 진영’에 섰고, 블라터 회장 사임 의지 표명으로 갑자기 열리게 된 내년 선거에도 출사표를 내밀었다. 블라터 회장에겐 끊임없이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정 명예회장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정 명예회장은 FIFA 윤리위원회의 악의적 제재를 바로잡고자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를 포함한 모든 법적인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 블라터 회장의 비자-마스터카드 사기 사건, FIFA 집행위원회의 승인 없이 받은 블라터 회장의 연봉 등에 관한 배임횡령 행위에 대해서도 소송을 진행 중이다. 부당한 제재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FIFA 윤리위원회에 대해서도 상응한 법적 조치를 할 예정이다. 그러나 부패한 FIFA 조직을 상대하기에 정 명예회장 측의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 명예회장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같은 FIFA에서 자신들의 안위만을 도모하며 FIFA를 계속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세력들이 있다면 이들은 블라터 회장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양심세력의 동조를 촉구하고 있지만 그의 노력이 빛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니 냉정하게 얘기해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7선 국회의원으로 한때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대권주자’였던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 청와대로 가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 국내 정치계에서 잠행기를 거친 그는 내년 4월 총선에서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를 일축한 채 ‘세계 축구 대통령’이라는 야심 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부패의 대명사’로 자리 매김한 블라터 회장의 벽에 막혀 후보 등록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세계 축구 대통령을 향한 그의 꿈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번 일로 서울시장 선거 패배 후 정치적 재기를 꿈꾸던 ‘7선 대권주자 정몽준’은 다시 일어날 기회를 잡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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