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흘 전, 114개의 공을 던지며 9이닝을 실점 없이 홀로 막아냈던 투수다. 고육지책으로 앞당겨 꺼내든 카드였지만,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위력적으로 버텨줄지는 미지수였다. 두산으로선 그저 믿었던 에이스가 벼랑 끝에서 또 한번 팀을 끌어 올려주기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의 격려와 박수 속에 마운드에 오른 두산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34). 그는 그 희망과 믿음에 보답하듯 눈부신 피칭으로 가을의 그라운드를 수놓았다. 더 이상 용병이라 불러서는 안 될 듯한 희생이자 투혼이었다.
니퍼트는 2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NC와의 플레이오프(PO) 4차전에서 7이닝 2안타 무4사구 6탈삼진 무실점의 완벽한 투구로 PO에서 팀이 따낸 2승을 모두 뒷받침했다.
그야말로 올 가을 최고의 투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퍼트는 올 시즌 내내 현역 최장수 용병다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깨도 아팠고, 허벅지도 아팠다. 두산의 다른 외국인선수들이 모두 부진했던 탓에 니퍼트의 공백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이라는 가장 중요한 순간, 에이스의 품격을 뽐냈다. 10일 넥센과의 준PO 1차전에서 7이닝 3안타(2홈런) 3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호투했고, 18일 PO 1차전에선 9이닝 3안타 2볼넷 6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거뒀다.
특히 PO 4차전은 니퍼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두산은 니퍼트의 역투를 앞세워 1차전 승리를 따냈지만, 2차전에선 반대로 NC 선발 재크 스튜어트의 구위에 눌려 완패했다. 잠실로 돌아와 맞이한 21일 3차전에선 아예 2-16으로 대패해 역대 포스트시즌 최다 점수차 패전을 기록하는 굴욕까지 맛봤다. 이제 한번만 더 지면 이대로 시즌을 끝내야 하는 상황. 두산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언덕은 1차전 이후 사흘밖에 못 쉰 니퍼트뿐이었다. 상대도 1차전에서 66구만 던진 에이스 에릭 해커를 조기 투입하는 강수를 뒀기에 더 그랬다.
마운드에 오른 니퍼트는 그러나 사흘이 아니라 3주를 쉰 투수처럼 공 하나하나에 온 힘을 실었다. 최고 구속은 154km를 찍었다.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1차전에서 니퍼트의 공에 연신 방망이를 헛돌렸던 NC 타자들은 나흘 후 다시 만나서는 더 어려워했다. 니퍼트 역시 오른쪽 엄지발가락 골절상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쓴 주전 포수 양의지와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아웃카운트를 늘려갔다.
7회까지 니퍼트의 투구수는 불과 86개. 이번 시리즈에서만 2번의 완봉승이 가능한 페이스였다. 그러나 두산 김태형 감독은 충분히 쉬지 못한 니퍼트의 몸 상태를 고려해 4-0으로 앞선 8회 투수를 이현승으로 교체했다. 에이스의 투혼을 앞세운 두산이 올 가을의 ‘미러클’ 드라마를 더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