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구’는 달콤한 사기극이다. 특히 올 시즌 프로야구가 그랬다. 전체 10개 팀 중 4개 팀이 얽히고설켜 치열하게 5위 다툼을 벌였다. 어떻게든 5위만 차지하면 ‘쿠데타’에 성공하리라는 확신 비슷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과는 싱거웠다. 혈투 끝에 5위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SK는 와일드카드 결정전 딱 한 경기로 무대를 떠났다.
올해만 그랬던 게 아니다. 지난해까지 12년 연속으로 단 한 차례 예외도 없이 한국시리즈 우승 팀은 페넌트레이스(정규 시즌) 1위 팀이었다. 언더독(이길 가능성이 적은 약자)을 응원하는 팬들은 저마다 가슴에 ‘역전 우승’이라는 네 글자를 품지만 현실은 실망뿐이었다. 승률을 따지면 더 심하다. 이 12년 동안 1위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승률 0.703(52승 4무 22패)을 기록했다. 이 기간 정규 시즌 때도 1위 팀이 한국시리즈 파트너에게 승률 0.543(114승 8무 96패)으로 앞선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 차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규 시즌 1위 팀이 꼴찌 팀을 상대로 기록한 승률 0.714(153승 4무 61패)하고 비교하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러니 인정하자. ‘현대 야구’에서 한국시리즈는 정규 시즌 1위 팀의 대관식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 야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처럼 단일리그로 시즌을 치른 24년 동안 정규 시즌 1위 팀이 아닌데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건 1989년 해태, 1992년 롯데, 2001년 두산 등 세 팀뿐이었다.
하지만 별수 없다. 이 세 팀이 있기에 언더독을 응원하는 팬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역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역전 우승을 했다는 건 올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속임수에 빠지고 싶은 건 오히려 언더독이다. “올해 우리는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너희들과 달리 우리는 챔피언이 될 것이다.”
왕자와 거지 놀이
한국시리즈가 이렇게 1위 팀에 유리한 건 계단식으로 포스트 시즌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으로 가을 야구를 시작하는 5위는 전승을 한다고 해도 8경기를 치른 뒤에야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계산하면 4위는 최소한 7경기, 3위는 6경기가 필요하다. 2위 팀도 적어도 3경기는 치러야 한다.
포스트 시즌이 찾아오면 라운드가 바뀔 때마다 TV 해설자들이 “상위 팀은 실전 감각이 떨어져 불리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먼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해 있는 상위 팀은 하위 팀끼리 ‘전쟁’을 벌이는 동안 자체 평가전 정도밖에 치를 수 없다. 이 때문에 경기 감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쉬는 동안 잔 부상에 시달리던 선수들이 정상 컨디션을 되찾는 등 팀을 정비한 효과가 훨씬 크다. 상대를 분석할 시간이 많다는 것도 1위 팀에 유리한 점이다.
하위 라운드는 그렇지 않다. 준플레이오프(13승 11패)나 플레이오프(16승 15패)는 오히려 하위 팀이 승리한 적이 더 많다. 차라리 처음부터 1, 2위만 한국시리즈 맞대결을 벌이면 가을 야구는 더욱 흥미진진한 외나무다리 승부로 변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포스트 시즌 경기 수를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을 야구 참가 팀을 5개 팀으로 늘리는 결정을 내렸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올해 프로야구는 4위와 5위 사이에 8.5경기 차나 났다. 예년 같으면 하위권 팀은 무의미한 경기를 벌여야 했지만 시즌 막바지까지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티켓을 잡기 위해 5∼8위에 들어찬 4개 구단이 몸부림친 결과다.
돈도 된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포스트 시즌은 원래 시범경기 성격이었다. 구단에서 입장 수익을 좀 더 거두려고 마련한 팬 서비스였다. 한 경기라도 더 늘어나면 입장 수익도 늘어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포스트 시즌 전체 수익 중 운영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순위에 따라 나눠 갖는다. 한국시리즈 우승 팀이 40%, 준우승 팀이 20%, 플레이오프 패배 팀이 12%, 준플레이오프 패배 팀이 8%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나머지 20%는 페넌트레이스 우승 팀이 챙겨 간다. 만약 페넌트레이스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했다면 60%를 가져가게 된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탈락한 SK는 0%다.
야구 한류
야구 제도나 문화는 보통 일본→한국 방향이지만 포스트 시즌은 반대다. 일본프로야구기구(NPB)에서 한국보다 뒤늦게 계단식 포스트 시즌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일본시리즈 우승 팀보다 정규리그 우승 팀을 더 높게 쳐줬다. 포스트 시즌도 센트럴리그 챔피언과 퍼시픽리그 챔피언이 맞붙는 일본시리즈 딱 한 라운드뿐이었다.
현재 방향으로 진화할 조짐이 처음 보인 건 2004년이었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는 퍼시픽리그에서 이제는 ‘클라이맥스 시리즈’라고 부르게 된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했다. 정규 시즌 3위 팀이 2위 팀과 맞붙어(퍼스트 스테이지) 승리한 팀이 1위와 리그 챔피언 결정전(파이널 스테이지)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일본프로야구 한 리그는 6개 팀으로 돼 있다. 이 중 세 팀에 가을 야구 티켓을 나눠 주자 ‘쇼카지아이(消化試合·순위 변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시즌 막판 경기)’가 줄어들었다. 올해 한국 팬들이 와일드카드 결정전 덕에 경험한 긴장감을 일본 팬들이 먼저 경험한 것이다.
센트럴리그도 2007년 똑같은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에 제1 스테이지, 제2 스테이지라고 부르던 라운드 명칭은 2010년 지금처럼 바뀌었다. 상위 팀이 높은 순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어드밴티지도 한껏 안겨준다. 두 라운드 모두 상위 팀 안방 구장에서만 경기를 치른다. 퍼스트 스테이지는 공식적으로 3전 2선승제지만 2위 팀은 3무만 해도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할 수 있다. 파이널 스테이지는 아예 6전 4선승제다. 1위 팀에 부전승을 먼저 안겨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2007년 이후 올해까지 양대 리그를 합쳐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모두 18번 열렸다. 이 중 정규리그 1위 팀이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건 세 차례(16.7%)밖에 되지 않는다. 센트럴리그에서 요미우리가 두 차례(2007, 2014년) 하극상의 피해자가 됐고 퍼시픽리그에서는 2010년 정규 시즌 1위 소프트뱅크가 3위 지바 롯데에 무릎 꿇은 적이 있었다.
다다익선
메이저리그도 갈수록 가을 야구 진출 팀 수를 늘려가고 있다. 1968년까지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은 양대 리그 1위 팀끼리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벌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1969년 양대 리그 밑에 동·서부 지구가 생기면서 지구 1위 팀끼리 챔피언 결정전을 벌여 월드시리즈 진출자를 가리게 됐다.
1995년에는 와일드카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해부터 양 리그를 3개 지구로 나누면서 홀수 체제가 됐다. 이 때문에 지구 1위를 제외하고 승률이 가장 높은 한 팀을 와일드카드로 뽑아 가을 야구 티켓을 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와일드카드를 만들 수 있게 지구를 3개로 나눴다. 메이저리그는 1994년 선수 노조 파업을 겪으면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못했다. 이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와일드카드 제도 도입을 통해 흥행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 것이다.
와일드카드 팀은 승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만큼 핸디캡을 안은 채 포스트 시즌을 치러야 했다. 와일드카드 팀은 지구 1위 팀 중 승률이 가장 높은 팀과 디비전 시리즈를 치르는 게 원칙이다.
그래도 계단식으로 승부를 치러야 하는 한국 일본과 비교하면 와일드카드 팀이라고 크게 불리할 건 없었다. 제도 도입 후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플로리다(현 마이애미·1997, 2003년), LA 에인절스(2002년), 보스턴(2004년), 세인트루이스(2011년), 샌프란시스코(2014년) 등 6개 팀이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핸디캡이 너무 약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게 당연한 일. ‘가을 야구는 상위 팀에 유리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한미일 야구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2012년부터 와일드카드를 두 팀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각 지구 1위 팀을 제외하고 승률이 가장 높은 두 팀이 단판 결정전을 치르도록 제도를 신설한 것이다.
승자와 패자 사이
프로야구는 보통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100경기도 넘게 치른다. 이 중에는 분명 져도 되는 경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엔 꼭 이겨야만 한다.
1999년 10월 20일 대구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7차전. 롯데의 ‘검은 갈매기’ 호세(50)가 동점 홈런을 친 뒤 관중에게 ‘컵라면 세례’를 받았다. 호세는 관중석을 향해 방망이를 내던졌고 결국 롯데 선수들이 삼성 팬들하고 뒤엉켜 싸우다 짐을 싸서 떠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오면서 롯데 주장 박정태(46)가 선수들을 불러 놓고 소리쳤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죽어도 오늘 여기서 이기고 죽어야 한다.” 롯데는 결국 임수혁(1969∼2010)의 역전 홈런으로 6-5로 승리를 거두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한화에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해 가을 야구 진짜 주인공은 롯데였다고 기억하는 야구팬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라면 두 번째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일 터다.
“시작부터 언더독이었다면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잊어라. 그대가 이 악물고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다. 선수들이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팬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가을 야구의 정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