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남자부 현대캐피탈이 올 시즌 ‘스피드 배구’를 표방하면서 숙소 겸 연습장으로 쓰는 복합 베이스캠프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 써놓은 문구다. 그런데 이 팀 주장 문성민(30)은 거꾸로 느려졌다.
일단 평균 스파이크 속도가 느려졌다. 연타(페인트) 비중을 늘리면서 생긴 일이다. 5일 맞대결을 펼친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은 경기 후 “성민이가 제대로 때린 건 4개밖에 안 됐다”고 말했다. 나머지 16개(80%)는 페인트였다는 뜻이다. 강스파이크는 공격수의 자존심이지만 문성민은 유능제강(柔能制剛·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을 믿고 있다. 동료를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6일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서 만난 문성민은 “예전에는 강하게 때려 내가 끝내고 싶었다. 이제는 100% 정확하게 때리기 힘들다고 판단하면 팀이 다음 찬스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타 공격을 하는데 득점 성공률도 제법 괜찮다”며 “세계적인 선수들도 화려한 플레이만큼이나 페인트 공격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성격도 느려졌다. 팀 전체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책임감이 생긴 것.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은 “예전에는 성민이가 팬 행사 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팬들과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가 됐다”며 “요즘 팀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 건 모두 문성민이 중심을 잡아 준 덕분”이라고 치켜세웠다.
문성민은 “지난 시즌까지는 팀 후배들이 선배 눈치를 보는 문화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주장을 처음 맡은 만큼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솔선수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이제는 후배들이 코트 안에서 말도 많이 하고 코트 밖에서 먼저 장난도 건다. 연습이 끝나면 같이 (컴퓨터) 게임도 하면서 똘똘 뭉쳐 지낸다. 팀이 밝아졌다”고 말했다.
결혼도 그를 바꿔 놓았다. 최 감독은 “제수씨가 복덩이”라고 평했다. 다음 달에 아들이 태어나는 문성민은 “이제는 확실히 경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뻐근하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만 앞으로도 코트 위에서 모두 다 쏟아내겠다”고 다짐했다.
문성민이 변하자 세터 노재욱(24)도 달라졌다. 노재욱은 올 시즌을 앞두고 KB손해보험에서 팀을 옮겼다. “성민이 형이 있어 든든하다”는 노재욱은 “처음 경기장에 서면 주눅 들 때도 있었는데 성민이 형이 ‘공격이 성공하면 네 토스가 좋아서 그런 거고, 실패하면 내가 범실한 거다. 형을 믿고 자신 있게 띄우라’고 얘기해 줘 힘을 얻었다”고 떠올렸다. 노재욱이 부상으로 3주간 경기에 나서지 못할 때도 문성민은 “형이 많이 다쳐봐서 안다. 서두르지 말라”며 위로했다.
‘슈퍼스타’ 문성민이 이렇게 일일이 신경을 쓰지만 노재욱은 너무 작은 선수였다. 배구 명문 성균관대에 다녔지만 4학년이 돼서야 겨우 주전 선수가 됐다. 광주전자공고 1학년 때는 키가 178cm밖에 안 됐다. 지금처럼 장신(191cm) 세터로 거듭나리라는 건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노재욱이 이렇게 잘하는 세터인 줄 몰랐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명세터 출신 최 감독도 노재욱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노재욱은 “처음 현대캐피탈에 와서 감독님과 하루에 2000개씩 토스 연습을 했다. 세계적인 세터 출신인 감독님이 나를 위해 고생하신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며 “요즘 TV 중계를 다시 보면 ‘내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에 신기하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꼭 ‘제2의 최태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최 감독은 “더 큰 목표를 잡아야지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느냐”며 웃었다.
결과를 떠나 올 시즌은 둘의 배구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던 해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두 선수는 인터뷰 내내 ‘재미있다’는 말을 열한 번씩 했다. 문성민은 “훈련도 재미있고 경기할 때도 재미있다. 올 시즌은 유독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라며 “현대캐피탈만의 색깔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팬들도 믿고 지켜 봐 달라”고 당부했다. 노재욱은 “꼭 국가대표가 되고 싶지만 그보다 팀 우승이 먼저”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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