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타자에게 중요한건 발 아닌 눈… ML 최근 출루율 높은 타자 선호
18년간 24도루 그친 ‘1번’ 보그스… 안타-사구 많아 명예의 전당 입성
김현수도 발 느리지만 선구안 탁월
야구에서 1번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빠른 발이 아니라 눈입니다. 그래서 김현수(28·볼티모어)가 1번 타자로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하려면 웨이드 보그스(58)를 본받아야 합니다. 선구안만 있으면 발이 느려도 좋은 1번 타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그스가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 ‘눈 야구’의 힘
볼티모어가 올 시즌 김현수를 1번 타자로 기용할 공산이 크다는 현지 언론 보도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벌써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발이 느려서 1번 타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죠. 김현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10년 동안 뛰면서 남긴 도루는 총 54개. 전형적인 1번 타자와는 거리가 먼 기록입니다.
그런데 2005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보그스는 더 심합니다. 보그스는 메이저리그 생활 18년 동안 도루를 24개밖에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역대 최고 1번 타자 리스트를 뽑을 때면 보그스는 어김없이 10위 안에 듭니다. 통산 볼넷 1412개를 얻어 낸 ‘매의 눈’이 느린 발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보그스는 안타도 3010개나 쳤습니다.
김현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던 비결 역시 ‘눈 야구’였습니다. 지난해 김현수는 생애 처음으로 세 자릿수 볼넷(101개)을 기록했습니다.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못한 채 당하는 ‘루킹 스트라이크 비율’도 김현수의 선구안을 보여 줍니다. 지난해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을 때 구심이 스트라이크로 판정한 공은 전체 투구 2331개 중 12.8%(299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리그에서 세 번째로 낮은 비율입니다. 김현수가 치기 나쁜 공은 철저히 골라내고 좋은 공에는 바로 방망이를 휘둘렀다는 증거입니다.
○ 세이버메트릭스의 힘
게다가 메이저리그에서 도루는 점점 ‘사라지는 기술(lost art)’이 되고 있습니다. 지명타자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아메리칸리그 소속 팀의 1번 타자들은 지난해 도루를 평균 20.1개 성공시켰습니다. 1995년에는 같은 기록이 31.4개였으니 20년 사이에 3분의 1이 사라진 겁니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15개 팀 중 3개 팀은 1번 타순에서 도루 10개도 얻어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도루가 줄어든 데는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한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도루가 득점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을 때의 손실도 너무 큽니다. 세이버메트릭스를 다룬 책 ‘더 북(The Book)’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에서 도루는 평균 0.175점을 보태지만 실패하면 0.467점이 깎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는 타순을 짜는 방식도 바꿔 놓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제일 잘 치는 타자가 4번 타자 자리를 맡지만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와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에서는 3번 타자의 OPS(출루율+장타력)가 4번 타자의 OPS보다 높습니다. 파워 있는 타자가 한 칸 앞으로 옮기면서 1번 타자도 빠른 발로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것보다는 살아 나가는 능력(출루율) 자체가 더욱 중요하게 됐습니다.
볼티모어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볼티모어는 올 시즌 홈런 타자 매니 마차도(24)를 3번 타순으로 옮긴다는 방침입니다. 당연히 ‘발 느린 톱타자’ 김현수 역시 출루 능력으로 팀에 보탬이 돼야 합니다. 발 빠른 주자가 2루로 뛰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1루에 가만히 서 있다가 홈런이 나오면 2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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