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6일 아침. 영하 13도 강추위에도 곤지암리조트 스키장에선 어린 학생 62명이 9개조로 나뉘어 강습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곤지암리조트가 있는 경기 광주시의 초중고교생으로 대부분은 스키라는 것을 처음 접해본 왕초보. 강습은 오전, 오후 두 차례. 이 하루 강습은 곤지암리조트가 5년째 계속해온 ‘광주시 어린이 스키사랑 캠프’ 초청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과 달리 특별했다. 60∼90대 스키 원로 10명이 동참해 청소년들의 첫 스키 경험을 축하해 주고 강사를 도와 직접 지도까지 해줘서다.
이 원로들, 경력이 화려하다. 회갑에 스키를 배운 뒤 연중 한국과 일본, 뉴질랜드에서 200일 이상 스키를 즐기는 올해 구순의 이근호 씨(설해장학재단 이사장). 대한스키협회 부회장을 지낸 그는 국내 최고령의 맹렬 스키어다. 대한스키협회 회장을 연임(1986∼96년)한 이승원 씨(84)는 현재 국제스키연맹(FIS) 부회장(집행위원)과 아시아스키연맹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제적 인사. 단국대 명예교수인 임경순 씨(85)는 1960년 미국 스쿼밸리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최초 스키 국가대표다. 60여 명의 스키어를 배출하며 강원 평창군 횡계에서 한국 최대의 ‘스키가문’을 이룬 어씨(魚氏) 스키 문중의 큰어른인 어재식 씨(67)도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던 국가대표다. 치과의사 김우성 씨(72)는 대한장애인스키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사업가 전동진 씨(75)는 대한스키협회 부회장으로 대한스키지도자연맹을 이끌고 있는 ‘스키의 교과서’. 윤진홍(75) 주선억(75) 황래열(67) 김정균 씨(66)도 모두 대한스키협회 이사로 활동했던 선수 출신의 스키 고수들이다.
그래서일까.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원로들은 아이들의 언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녹여 주거나 넘어진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주며 열심히 강습을 도왔다. 그런 정성이 통한 것일까. 한 아이가 YT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세 분이 국가대표셨잖아요. 그분들께 배웠으니 저도 나중에 국가대표 선수가 될래요.”
이 스키사랑 캠프에 원로 스키어가 동참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겨울에 눈만큼 즐겁고 재미있게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리고 눈을 즐기는 데는 스키와 스노보드가 최고니까요.” 이승원 FIS 부회장의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FIS가 주도하는 ‘어린이를 설원으로(Bring Children to the Snow)’라는 글로벌 캠페인을 소개했다. 이 캠페인은 ‘FIS 스노키즈(SnowKidz)’와 ‘세계 눈의 날(World Snow Day)’ 이벤트를 통해 지구촌의 4∼14세 어린이들에게 ‘생애 첫 스키’ 체험을 시켜주는 게 목적. 그는 “우리 원로부터 솔선수범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캠페인을 도입하려 했는데 마침 곤지암리조트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린이와 할아버지의 ‘함께 스키’. 이거야말로 스키어가 감소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스키 부흥(Ski Renaissance)’에 힘을 불어넣을 방안이 아닐까 싶다. 한국스키장경영협회(회장 조현철)에 따르면 우리나라 스키장 방문객은 2012, 2013년 시즌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표 참조). 스키 인구는 1975년 용평리조트 개장을 계기로 급증했다. 하지만 내장객 686만3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3년부터 하향세다. 17개로 늘어난 스키리조트는 이제 레드오션에 던져진 셈. 하지만 그걸 타개할 묘책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FIS가 오히려 그 답을 제시한 셈인데 바로 미래의 고객인 어린이를 스키장으로 불러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좀 다르다. 휴가일수가 서양보다 현저히 적다 보니 부모 동반은 언감생심. 그래서 자연스레 부모 대신 할아버지가 관심을 끌게 됐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곧바로 스키 원로와 곤지암리조트가 공유했다. 곤지암리조트가 다른 리조트에 앞서 올 시즌 ‘함께 스키(Skiing Together)’라는 마케팅 전략을 도입한 데도 배경이 있다. 이미 5년 전부터 60∼80대 시니어 스키어가 시즌 내내 곤지암의 설원을 달구고 있어서다. 이들은 대부분 은퇴자로 붐비지 않는 주중 오전에 20여 명씩 모여 스키를 즐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시니어 스키어를 생애 첫 스키의 어린이와 만나게 하자’란 아이디어는 그렇게 나왔다. 그런데 마침 지난해 말에 노장 스키어 모임 ‘스키원로인회의’(회장 윤진홍)가 FIS의 ‘어린이를 설원으로’ 캠페인 실천을 위해 스키클럽을 결성했다. 그래서 곤지암은 아예 그 클럽을 유치해 ‘함께 스키’의 파트너로 삼았다. 그게 광주시 어린이 스키사랑 캠프에 원로 스키어 모임 ‘스키클럽 곤지암’(회장 임경순)이 참가하게 된 경위다.
처음으로 스키어 감소 시대를 맞은 한국 스키장.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세대의 이탈이다. 한겨울에 스키와 보드를 배우려는 젊은이가 준 건 40년 만. 저성장과 청년실업 등으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진 데다 그들의 관심이 여행, 게임, 스마트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분산된 탓이다. 똑같은 현상이 일본에선 이미 1994년부터 나타났고 원인 분석도 명쾌했다. ‘닌텐도와 스마트폰, 경기 후퇴가 스키어를 쓸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세상은 늘 상대적이다. 뭔가가 사라지면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시니어 스키어의 대두가 그것. 젊은 스키어가 줄자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노장층이 늘어났다. 주역은 745만 명에 이르는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이들은 1975년 국내 최초로 스키리프트를 갖춘 용평리조트 개장 이후 스키에 입문해 근 40년 지속된 스키 붐과 경제성장기에 스키를 즐겨온 스키 애호가들(Serious Skier). 은퇴를 하면서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갖고 한겨울에 스키장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곤지암리조트가 시니어 스키어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서울서 가까운 데다 평소에도 쾌적한 슬로프가 주중엔 더욱 그래서다. 충돌 위험이 적다 보니 선호할 수밖에. 이들은 매주 하루를 정해 함께 스키를 즐긴다. 오전 9시경에 모여 정오까지 탄 뒤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 또 정기적으로 국내 리조트에서 1박 2일 숙박 스키도 즐긴다. 시즌 중 한두 번은 외국으로 스키 여행도 떠난다. 이런 모임으로 이름난 곳은 ‘서설회’(서울고 동문)와 ‘설목회’(경기고 동문). 각각 수요일과 화요일에 곤지암에 모여 함께 스키를 즐긴다.
“벌써 15년째지요. 곤지암에서는 5년째고. 모임 자체도 즐겁지만 후배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노장 선배들이 함께 어울려 스키를 즐기는 모습이 장차 은퇴할 후배들에게 자극을 준다고 하네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미리 체력도 키우고 경제적 여유도 갖춰야 하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저런 여유를 즐길 정신적 건강이니 라이프스타일부터 바꿔야겠다’고요.”
서설회 멤버인 오건 씨(59·싱크원 대표)의 말이다. 서설회는 올해 팔순에 들어선 8회부터 50회까지 80명이 회원이다. 서울고는 캐나다스키협회의 검증단계 중 최고인 레벨4의 양성철 씨(장애인스키국가대표팀 알파인스키 코치)와 홍철민(45회) 한정재(46회) 이정근(48회) 이호성 씨(50회) 등 네 명의 국가 데몬스트레이터를 배출한 스키부 덕분에 열정 스키어가 유난히 많은 학교다. 3월에도 15명이 일본으로 열흘간 스키 여행을 떠난다.
‘설화(雪花)모’는 60, 70대 경기고 동창 20여 명(절반은 은퇴자)의 스키 모임. 모임 이름은 ‘눈꽃’이라는 뜻도 있지만 ‘화(花)’는 옛 경기고 교정(현재 정독도서관)이 있던 ‘화동(花洞·종로구)’에서 따왔다. 이들도 6년째 곤지암에서 함께 스키를 즐기는데 역시 한 달에 한 번 하이원 용평 휘팍에서 2박 3일 스키 모임을 갖는 열성파. 며칠 전엔 15명이 일본의 시가고겐 스키장(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개최지)에서 지내다 돌아왔다.
“실력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열심히 스키를 탑니다. 후배 중엔 이 모임 밖에서 기수별로 함께 타는 그룹도 많지요.” 은퇴 후 스키를 즐기기 위해 아예 평창군 횡계리로 이사를 간 설화모 멤버 이기윤 씨(70)의 말이다. 그는 “스키란 게 혼자 타면 고역이지만 함께 타면 엔도르핀이 팍팍 솟는 기막힌 운동이다. 스키잉 후 목욕으로 피로를 풀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며 나누는 한담도 ‘함께 스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이 씨는 스키가 60대 이상이 즐기기에 적당치 않다고 보는 일반의 시각을 이렇게 반박했다. “제가 보기엔 자전거가 더 위험해요. 등산도 마찬가지고. 스키도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즐기는 겁니다. 안전수칙만 잘 지키고 위험 요소를 피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가 곤지암을 찾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주중엔 스키어가 많지 않거든요. 사고 위험이 적지요.”
운동부상 전문의 은승표 박사(코리아정형외과 원장)는 “고령자가 운동할 경우엔 관절연골 보호가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땅을 딛는 등산이나 달리기보다는 눈 위를 미끄러지는 스키가 더 낫다”면서 “무엇보다도 스키의 장점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라며 스키 예찬론을 폈다.
전 세계 스키장의 트렌드로 주목받는 게 또 하나 있다. 스노보더의 감소다. 미국에선 이미 3년 전부터 그랬다. 2012년 12월 캘리포니아 주의 한 스키숍은 스키잡지에 이렇게 밝혔다. 스키가 25대 팔릴 때 보드는 한 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몇 년 전만 해도 1 대 1이었으니 실로 큰 변화다. 같은 시기 이곳의 마운틴하이 스키장에선 1년 전 8만 명이던 스노보더가 절반가량인 4만4000명으로 줄었다.
우리는 어떨까. “10년 전 최성수기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이고 앞으로 더 줄 것 같네요.” 아머스포츠코리아 김용욱 과장(살로몬 마케팅 담당)의 전망이다. 이는 수입 통계가 증명한다. 2012년 스노보드 수입량(무게 기준)은 2007년에 비해 25.1%나 줄었다(한국관세무역개발원의 수출입 동향 분석). 반면 스키 시장은 증가세라고 김 과장은 말한다. “마니아층의 최상급 장비 수요가 늘고 어린이와 10대들이 새로 진입하면서 매출이 지난 시즌에 비해 20% 늘어났습니다. 앞으로 국내 스키 시장은 이들을 중심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격변을 목전에 둔 한국의 스키 시장. 시니어 스키어와 주니어 스키어의 부상은 스키 르네상스의 화두다. 그리고 이 둘의 ‘함께 스키’만이 겨울올림픽 개최국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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