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지휘봉 대신 마우스 잡은 양승호 전 감독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2월 4일 05시 45분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이 3일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한국종합물류주식회사 사무실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양 전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에서 물러난 뒤 물류회사 부사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이 3일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한국종합물류주식회사 사무실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양 전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에서 물러난 뒤 물류회사 부사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남몰래 생활비 보내준 절친 사장 권유에
‘물류회사 부사장’ 샐러리맨으로 새 인생
“최소 1년은 이곳서 최선 다할 것” 의욕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존재다. 양승호(56) 전 롯데 감독(56)을 만난 뒤 든 생각의 첫머리였다. 롯데 역사상 최고승률 감독임에도 부조리한 구조에 저항하다 프로야구 감독이라는 절대권력에서 내려왔다. 악재는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고려대 감독 시절 학부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배임 혐의로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싶었던 야구계 현장에서 멀어진지 3년여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웠기에 자살충동까지 느꼈던 서글픔을 넘어 무기력의 단계로 접어들 무렵, 양 감독은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대한민국 샐러리맨인 ‘미생(未生)’의 삶을 살기로 인생궤도를 튼 것이다.

‘물류회사 부사장’ 양승호

‘한국종합물류주식회사 부사장 양승호.’ 양 전 감독이 1개월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서울 강서구의 회사를 3일 찾아갔더니 이런 명함을 건네줬다. 야구점퍼 대신 회사점퍼를 입고 다니고, 덕아웃의 선글라스 대신 사무실에서 안경을 끼고,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읽는다. 그는 “다른 일은 적응할 만한데 영어 문서는 정말 모르겠다. 집사람한테 가지고 가서 물어본다”고 웃었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까지 사무실에 앉아있고, 퇴근 후 수시로 술자리를 갖는 전형적인 월급쟁이의 삶을 살고 있다. 일자리를 마련해준 ‘10년 지기’ 김연태 대표이사는 “편하게 다니시라”고 배려하지만, 정해진 출근시간보다 일부러 1시간 일찍 출근한다. 양 전 감독의 미덕인 친화력은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여직원들 이름이 헷갈려 별명으로 부른다”며 웃었다. 영화 ‘인턴’에 나오는 로버트 드니로 같았다.

을(乙)로 사는 인생이란?

양 전 감독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의욕이 강해 보였다. 김 대표이사와 동행해 베트남 출장도 여러 번 다녀왔다. 전직 야구 감독이라는 배경 덕분에 거래처에서 호감을 가져 유리하다. 오랜 기간 쌓아온 인맥은 그만의 자산이다. 대접 받던 위치에서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는 자리로 옮긴 ‘시차적응’이 힘겨울 법하지만, 양 전 감독은 의연했다. 갑의 위치에 있을 때도 을의 처세로 살아온 덕분이다. 삶의 굴곡을 겪으며 세상인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다. 그래서 오갈 데 없을 때 받아준 김 대표이사에게 감사하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내가 돈을 못 벌 때, 나도 모르게 집사람에게 생활비를 보내줬더라. 이런 김 대표이사가 ‘같이 일을 하자’고 권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물류업은 ‘1년에 1만개의 업체가 경쟁해 1000개의 업체가 망한다’고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이 업(業)은 사람을 다루는 야구 감독의 일과 겹치는 면이 많다. 양 전 감독은 “올해 국내 대기업이 필리핀에 진출하는데 물류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 “당분간 야구계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월급을 주는 회사에 충실하려는 양 전 감독에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야구를 가르치는 일이라면 잠시 자리를 비운다. “1월에 제주도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하러 갔다. 금요일부터 다음주 월요일까지 가르친 뒤 화요일 새벽 비행기로 돌와와 출근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의 수첩은 기업체 사람들과 만나는 스케줄로 빼곡하지만, 유일한 예외는 야구 교습이다. 평생을 해왔고 천직인 줄 알았던 야구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심정을 양 전 감독은 허탈한 미소로 대신했다. “처음에는 ‘3년 정도 지나면 다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주변에서 위로했다. 그러나 감독까지 했던 사람이라 야구단이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지난해 야구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을 보고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지금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야구계가 그를 잊었어도 그가 야구를 잊은 것은 아니다. 꼭 현장 복귀가 아니더라도 교습이든 기고활동이든 야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할 생각이다. 양 전 감독은 “최소 1년 동안은 이 회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업무상 술을 자주 마셔야 하는데 (빨리 취하지 않도록) 페이스 조절하는 비법을 김 대표이사에게 배워야 할 것 같다”고 웃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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