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3할 타자는 땀으로 만들어지고, 홈런 타자는 어머니 배 속에서 결정된다”고 말했다. 국내 타격 전문가들은 “이승엽과 박병호는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타구가 멀리 갔다. 베이브 루스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승엽이 10여 년 전 그랬듯, 그 후계자인 박병호도 올해 해외로 떠났다. 홈런왕좌가 텅 비었다. 이제 홈런 레이스는 2인자였던 NC 외국인 타자 에릭 테임즈(47개)의 독주가 유력하다. 국내 선수 중 그에게 맞설 대항마는 없다. 강민호(롯데), 나성범(NC) 등은 한 시즌 홈런이 30개 전후다.
그런데 요즘 이승엽이 심상찮다. 불혹의 백전노장이 전지훈련 연습경기에서 날카로운 타구를 뽐내고 있다. 5경기에서 홈런이 무려 3개나 된다. 스스로 “오버 페이스가 염려돼 힘을 빼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승엽이 테임즈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까? 숫자만 보면 무모한 생각이다. 이승엽의 지난해 홈런은 26개. 전성기였던 2003년 56개의 절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스윙이 예사롭지 않다. 전성기 배리 본즈(사진)를 떠올리게 한다.
메이저리그 홈런 타자 본즈. 한 시즌 최다 홈런(73개) 및 통산 최다 홈런(762개)을 기록한 전설이다. 나이 마흔을 전후로 대기록을 썼다. 당시 그의 스윙은 한눈에도 특별했다. 양발의 간격과 스윙 궤적이 비정상적으로 짧았다. 벼락 치듯 스윙해 홈런 타구를 만들어냈다. 본즈의 띠동갑으로, 이제 40대에 들어선 이승엽의 스윙이 딱 그렇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본즈가 그랬던 것처럼 이승엽도 노화를 인정하고 변화를 선택했다. 스윙은 타이밍과의 싸움이다. 공과 배트가 만나는 지점(히팅 포인트)이 앞다리 엄지발가락 부근에서 형성돼야 장타가 나온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히팅 포인트가 자꾸 뒤로 밀린다. 근력이 문제가 아니라 반응 속도가 떨어지는 탓이다. 그게 바로 노화다.
신경세포의 노화가 근본 원인이어서 몸의 반응 시간은 줄일 수 없다. 그런데 앞다리를 뒤로 당겨 양발의 간격을 줄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면 정확한 히팅 포인트도 덩달아 뒤로 가게 된다. 스윙이 좀 늦더라도 제대로 된 히팅 포인트에서 공을 때릴 수 있다. 과거 1m가 넘던 이승엽의 양발 간격은 이제 60cm 정도에 불과하다. ‘콜럼버스의 계란’ 같은 발상이지만, 이 방법으로 본즈가 성공했고, 이승엽도 그렇게 부활했다. 바뀐 폼이 더 정교해지면서 올해 전지훈련에서 더 강해진 것이다.
몸의 노화는 그렇게 극복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마음의 노화다. 이승엽은 홈런왕에 딱히 욕심이 없어 보인다. 올 시즌 목표가 홈런 30개다. 한일 통산 600홈런에 25개가 남은 상황. 그 목표 정도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승엽 나이 때 본즈는 행크 에런의 통산 홈런 기록(755개)을 깨기 위해 젊은 홈런 타자들과 지독한 경쟁을 벌였다. 금지약물이라는 불명예와 별개로 그의 스윙과 노력은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타격 전문가인 박영길 전 삼성 감독은 “이승엽이 욕심만 낸다면 홈런 40개도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승엽이 홈런 레이스에 뛰어들면 국내 프로야구 홈런 기록은 그만큼 가치가 올라간다. 또 해외파들의 이탈로 우려되고 있는 리그의 흥행도 좋아질 수 있다. 2년 뒤 은퇴할 거라고 미리 선언한 이승엽. 베이브 루스의 말대로 홈런왕은 타고나는 거라면, 이승엽에겐 그만큼의 의무도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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