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옥 기자의 야구&]절박함과 여유로… ‘돌아온 김상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5일 03시 00분


프로야구 2009시즌이 끝난 직후 김상현(당시 KIA)은 각종 시상식에서 MVP 트로피를 휩쓸었다. 한 달가량의 시상식 기간에 그해 연봉(5200만 원)보다도 많은 상금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금은 어디에 쓸 거냐”는 질문에 “제가 아직 배가 고파서…”라며 수줍게 웃었다. 통상 ‘아직 배가 고프다’라는 말은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하지만 김상현의 말은 그간의 허기를 보상받고 싶다는 뜻이 강했다. 10년 가까운 무명의 삶이 그만큼 고단했던 것이다.

김상현은 미운 오리 새끼였다. 2002년부터 LG의 미래를 책임질 거포로 기대를 모았지만, 한 번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타고난 힘을 가졌고, 훈련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땡볕 훈련으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별명이 ‘김 상사’였다. LG가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 이유였다.

그런데 기대했던 그림이 끝내 나오지 않았고, LG는 2009년 그를 KIA로 트레이드했다. 벼랑 끝에 몰린 김상현은 더욱더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조범현 감독과 황병일 코치는 그에게 ‘여유’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 덕에 김상현은 삼진을 당해도 더그아웃의 감독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됐고, 서너 타석에서 안타를 못 쳐도 교체될 염려 없이 다음 타석을 대비할 수 있었다. ‘절박함과 여유’라는 이상적인 발아 조건에서 김상현의 재능은 거의 10년 만에 싹을 틔웠다. 김상현은 그해 최희섭과 ‘CK포’를 구축하며 홈런왕(36개)과 타점왕(127개)에 올랐다. 덕분에 KIA는 통산 10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홈런왕의 싹은 더 자라지 못하고 이내 시들었다. 부상도 생겼고, 상대의 견제도 거세졌지만, 김상현이 금세 포만감을 느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훈련이 느슨해졌고, 스윙에선 ‘여유’가 사라졌다. 과거처럼 힘(파워)에만 매달리는 B급 홈런타자가 됐다. 2010년 홈런 21개, 2011년 14개, 2012년 4개로 급속히 추락했다. 황병일 코치(kt)는 “김상현이 배가 불렀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사라졌던 김상현이 김 상사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조 감독과 kt에서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된 김상현은 홈런 27개로 부활했다. 인천이 집인 그는 수원 야구장 인근에 방 한 칸을 얻고 훈련에만 매달렸다. 홈런 27개는 그 절박함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리고 그 홈런 수를 밑천 삼아 지난해 말 FA 계약(4년 17억 원)을 했다. 조급하지 않아도 될 ‘여유’를 찾게 된 것이다.

조 감독은 ‘절박함과 여유’라는 2009년의 발아 조건을 다시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김상현이 올해는 홈런 40개는 칠 수 있다”고 공언했다. 40개는 홈런왕을 다툴 수 있는 수치다. 너무 과한 수치 같지만, 김상현 스스로 “너무 늦게 스윙에 눈을 떴다”고 애통해할 정도로 요즘 밀어치는 스윙이 일품인 것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다.

김상현은 시범경기 첫날 보란 듯이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복귀 신고를 제대로 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처럼, ‘김 상사’가 먼 길을 돌아와 다시 팬들 앞에 섰다.

윤승옥 기자 touch@donga.com
#프로야구#김상현#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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