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반이던 2005년 전국종별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112등을 했다. 전체 참가 선수는 134명이었다. 이해에는 국가대표는커녕 경기도 대표로도 뽑히지 못해 전국체육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활을 처음 잡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로 가장 심한 부진이었다. 슬럼프에서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2관왕(개인전, 단체전)을 차지한 양궁 국가대표 기보배(28·광주광역시청) 이야기다.
이런 선수를 뽑겠다고 6개월을 쫓아다닌 대학 감독이 있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는 참 뻔질나게 찾아갔죠. 보배 아버님 앞에서 무릎 꿇고 술도 따르고….”
김성은 광주여대 양궁부 감독(42)이 말하는 기보배 스카우트에 얽힌 11년 전 얘기다. 당시 기보배는 경기 안양 성문고를 다니고 있었다. 기보배의 부모는 딸이 집에서 먼 광주까지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기보배의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술까지 따르며 “맡겨만 주면 반드시 국가대표로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스카우트에 성공했다.
전국 100등 안에도 들지 못하는 선수인데 뭘 보고 스카우트하려고 했을까. 김 감독은 “보배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잘 가르치면 반드시 대성할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보배는 중3 때 전국소년체전에서 3관왕을 하며 주목받았다. 김 감독은 “중학교 때 잘나가던 선수가 고등학교에 가서 슬럼프에 빠지면 대개는 울고불고한다. 하지만 보배는 안 그랬다. 전국 100등을 해도 눈빛이 살아 있었다”고 기억했다. 김 감독이 약속한 대로 기보배는 대학 2학년이던 2007년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여자 양궁 사상 첫 개인전 2연패에 도전하는 기보배는 세계 랭킹 3위다. 세계 랭킹 1위로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는 최미선(20·광주여대)도 김 감독의 제자다. 둘은 학과(초등특수교육과)도 같다. 06학번인 기보배가 15학번인 최미선의 9년 선배다.
김 감독이 최미선을 처음 본 건 중2 때다. 당시 전국의 중고교 유망주들이 광주에서 합동훈련을 했다.
“한눈에 확 들어왔죠. 긴 팔을 포함해 활을 쏘기에 아주 좋은 골격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중학생으로 보기 힘들 만큼 활을 쏠 때 집중력이 대단했습니다.”
김 감독은 이때 이미 최미선의 스카우트를 결심하고 3년 넘게 공을 들였다. 김 감독은 최미선의 부모를 찾아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국 꼴등을 해도 스카우트하겠다. 그러니 꼭 광주여대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최미선이 꼴등을 할 리는 없다는 걸 알고 한 얘기다. 최미선은 고1이던 2012년 말 국가대표 2진으로 뽑혔고, 대학 입학 첫해인 2015년부터 국가대표 1진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최미선을 스카우트할 때는 기보배보다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다. 우선 최미선은 광주에서 멀지 않은 전남 무안의 전남체육중고를 나왔다. 실업팀에서도 최미선을 탐낸 곳이 있었지만 최미선이 대학 생활을 해보고 싶어 한 것도 김 감독에게는 행운이었다.
기보배가 런던 올림픽 2관왕이기는 하지만 최근 기세만 놓고 보면 최미선이 낫다. 4월 열린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최미선이 1위, 기보배는 2위를 했다. 기보배가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에 따른 가산점 2점을 안고 선발전에 나섰는데도 최미선이 앞섰다. 최미선은 지난해 리우 프레올림픽 개인전 우승과 올해 2, 3차 월드컵에서 두 대회 연속 3관왕(개인전, 단체전, 혼성팀전)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기보배는 올해 2, 3차 월드컵 모두 8강에 머물렀다. 하지만 김 감독은 최근 다소 주춤한 기보배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보배는 올림픽을 한 번 경험한 선수다. 월드컵도 물론 중요한 대회이지만 지금 보배는 모든 걸 올림픽 경기 날짜에 맞춰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보배만큼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 감독은 “집중력이나 승부욕은 미선이가 조금 더 낫고, 경기 흐름이나 경기장 환경에 대한 판단과 적응은 보배가 좀 더 빠르다”며 “미선이는 시위를 당기면 거의 1초 만에 쏘는 속사형이고, 보배는 시위를 좀 더 오래 붙들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면 기보배는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이 있고, 최미선은 눈에 힘이 들어간다고 했다.
물론 둘 다 가르치면 자기 것으로 만드는 흡수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김 감독은 “보배나 미선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면 단번에 다 교정이 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김 감독에게 뻔한 질문을 던졌다. 둘 중 누가 더 금메달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지…. 예상했던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반반이다. 경기 당일 컨디션에 달려 있다고 본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라면 누구라도 금메달 후보다. 둘 다 믿는다.” 김 감독은 두 제자의 올림픽 경기를 리우 현지에서 지켜보며 응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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