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귀화 거부한 교포3세 유도 대표… 부친이 부담 안주려 조용히 리우行
충격패 본 뒤 고개 떨군 채 日 귀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30시간이 넘게 걸린 긴 여정이었지만 시상대에 오를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곤한 줄도 몰랐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경기가 열린 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2. 관중석 한쪽에 자리를 잡은 안태범 씨(52)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경기장에 들어서는 아들 안창림(22·수원시청)을 지켜보며 가슴 한편에 뜨거움을 느꼈다. 해외 언론들까지 금메달 후보로 꼽았던 아들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 “日귀화는 지는 것”이라 했던 안창림… 4년뒤 도쿄올림픽서 금빛 꿈 재도전 ▼
1회전 부전승에 이어 32강전을 완벽한 한판승으로 마쳤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부자의 꿈이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다. 16강전에서 아들이 만난 상대는 디르크 판 티헐트(32·벨기에). 이전에 두 번 만나 모두 이긴 선수였다. 하지만 아들은 2분 47초 만에 절반을 내주며 충격의 패배를 당했다. 경기가 끝난 뒤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안 씨는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길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미안해할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해 아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잘 알기에 안 씨의 마음은 더 아팠다.
아들은 고교 때부터 교토를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에는 1년에 2, 3차례 들르는 게 전부였다. 접골원을 운영하는 안 씨는 아들이 집에 오면 정성껏 마사지를 해 줬다. 아들은 트레이너나 물리치료사보다 아버지에게 몸을 맡기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때 유도를 시작한 아들이 일본의 유도 명문 쓰쿠바대에 입학했을 때 안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귀화를 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면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을 텐데….”
강원도 출신으로 도쿄로 유학을 온 할아버지의 후손인 아들이 ‘재일동포’라는 꼬리표 때문에 국제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 말이었다. 정작 안 씨는 갖은 차별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평생을 한국 국적으로 살았다. 아들이 귀화를 하면 동포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들은 좀 더 편한 길을 택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들은 자신보다 못한 선수들이 일본 대표로 뛰는 걸 지켜볼 때 화도 났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 씨가 귀화 얘기를 꺼냈을 때 ‘귀화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은 한국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2013년 전일본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쓰쿠바대 감독은 물론이고 일본 대표팀 감독까지 귀화를 권했지만 아들은 태극마크를 선택했다.
이날 경기장을 빠져나오다 우연히 재일본대한체육회 최상영 회장 일행과 마주친 안 씨는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만 말했다. 허탈하긴 최 회장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재일동포 2세로 1969년 한국 수영 국가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최 회장은 안창림의 한국행에 힘을 실어 줬었다. 최 회장은 매년 전국체육대회에 100명이 넘는 재일동포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고 있다. 안창림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재일동포 선수단의 일원으로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했다.
최 회장은 “재일동포가 3, 4세대로 이어지면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많이 흐려지고 있다. 안창림은 젊은 재일동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는 선수다. 오늘이 끝이 아니다. 4년 뒤에는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일본의 한복판에서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림은 40년 만에 재일동포로서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다. 비록 이번엔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4년 뒤로 미뤄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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