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때 골프채 휘두르던 신동…14년 만에 세계를 호령하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8월 23일 05시 45분


김시우.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김시우.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김시우 윈덤챔피언십 정상…한국인 5번째·최연소 PGA 우승

챔피언 김시우를 만든 4가지 힘

① 신동 : 만화보다 골프에 빠진 7세 천재
② 근성 : 끝장 봐야 골프채 내려놓는 독종
③ 대디 : 아들위해 올인한 ‘골프대디’ 헌신
④ 후원 : CJ 전폭적 지원으로 투어에 집중


남자골프의 차세대 에이스 김시우(21·CJ대한통운)가 마침내 일을 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윈덤챔피언십(총상금 560만 달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상금은 100만8000달러(약11억3000만원).

김시우는 22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 서지필드 골프장(파70)에서 열린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언더파 67타를 쳐, 합계 21언더파 259타로 정상에 올랐다. 전 세계랭킹 1위 루크 도널드(잉글랜드·16언더파 264타)를 5타 차로 따돌린 완벽한 우승이었다. 이날로 21세 1개월 24일이 된 김시우는 한국선수로는 최경주(46), 양용은(44), 배상문(30), 노승열(25)에 이어 5번째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고, 또 역대 한국선수 최연소 우승기록(종전 노승열 22세 10개월)을 세웠다.

● 7세에 골프채 휘두른 골프신동

“아빠 연습장 간다.”

아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곱 살 김시우는 자기 키 보다 더 큰 드라이버를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개구쟁이 김시우의 어린 시절 유일한 놀이는 골프였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태어난 김시우는 골프를 좋아하는 아빠를 따라 골프연습장에 놀러가는 걸 좋아했다. 장난감보다 골프채 휘두르는 걸 더 좋아했고, 만화영화 주인공이 아닌 세르히오 가르시아에 푹 빠져 살았다.

2001년 여름의 일이다. 서울 용산의 한 골프연습장이 떠들썩했다. “골프신동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7세 꼬마는 드라이버를 들고 펑펑 샷을 날려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웠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시우는 강원도 속초로 전학을 갔다. 당시 강원도는 골프의 메카로 통했다. 주니어 무대를 평정하고 있던 김경태(30·신한금융그룹)를 비롯해 노승열(25·나이키), 이보미(28·혼마골프) 등이 같은 시기에 골프를 했다. 그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김시우는 누나, 형들과 경쟁하면서 자연스레 근성을 키웠다.

김시우가 22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서지필드 골프장에서 열린 PGA 투어 윈덤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캐디와 포옹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김시우가 22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서지필드 골프장에서 열린 PGA 투어 윈덤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캐디와 포옹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김시우에게 아버지는 스승이자 후원자

어려서부터 아버지 밑에서 골프 배워
사업까지 접고 골프선수 아들에 올인

골프신동으로 불리던 김시우는 중학생이 된 이후 두각을 보였다. 주니어 대회에서는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트로피를 들고 와 ‘무적’으로 통했고, 중학교 2학년 신분으로 한국오픈에 최연소 출전했다. 이후에도 신한동해오픈과 SK텔레콤오픈에 출전해 프로 선배들에 뒤지지 않는 경기를 선보여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상비군과 국가대표를 거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서 최연소 (17세 5개월 6일) 통과 기록을 세우며 프로의 꿈을 이뤘다. 골프신동에서 PGA 투어 진출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 타고난 근성, 끝장 봐야 골프채 내려놔

김시우는 승부욕이 강하다. 한번 실패한 대회는 꼭 다시 출전해 좋은 성적을 내고 돌아와야 직성이 풀렸고, 지고나면 잘못한 부분을 바로 잡을 때까지 골프채를 내려놓지 않는 성격이다.

지난 2월 미국 LA에서 김시우를 만났다. 5주 연속 PGA 투어에 출전 중이던 김시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를 마치고 LA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정도 푹 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음날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골프장으로 향했다.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다음 대회가 열리는 LA 인근 퍼시픽 팰리세이즈의 리비에라 골프장으로 이동했다. 노던트러스트오픈은 김시우가 PGA 투어에서 활약한 이후 처음 나가는 대회이자 가장 규모가 큰 대회였다. 잘치고 싶었던 김시우는 휴식이 아닌 연습으로 또 하루를 시작했다.

김시우의 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2년 동안의 웹닷컴투어 생활이다. 고단한 생활을 모두 이겨냈다.

2012년 PGA투어에 진출하고도 반쪽짜리 선수가 된 김시우는 웹닷컴투어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나이 제한 때문이었다. 그때 선택한 길이 월요예선(먼데이)이다. 하루 경기를 치러 상위에 오르면 대회 출전권을 주는 제도다. 나이제한이 없다.

보통의 선수들은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에만 나간다. 상금도 주지 않아 떨어지면 교통비만 날리고 오기에 먼 지역까지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김시우는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돈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무식하게 도전했다. 이렇게 1년의 세월을 보낸 김시우는 다음해 웹닷컴투어 시드를 획득하면서 한 계단 성장했다.

2년 동안의 고된 생활은 김시우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낯설고 처음 접해본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미국에서 생활했던 부모는 아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측은한 나머지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했다. 그러나 김시우는 오로지 PGA 재입성만을 생각하며 전진했다. 몇 주씩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으로 이어지는 투어를 끝내고 돌아오면 체중이 7∼8kg씩 빠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김시우의 근성을 꺾지는 못했다. 마침내 지난해 7월 웹닷컴투어 스톤브래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시우는 3년 만에 PGA 재입성이라는 목표를 이뤄냈다.

김시우.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김시우.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아들 위해 ‘올인’ 선택한 부모

부친 김두영 씨는 서울에서 렌트카사업을 했다. 그러나 아들이 본격적으로 골프선수의 길을 선택한 뒤로는 사업을 접고 아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위로 누나가 있지만 아들과 골프에만 전념했다. 아들에 비해 신경을 쓸틈이 없었지만 다행히 큰 딸도 잘 성장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워낙 어려서 골프를 시작한 탓에 김시우의 유일한 스승은 아버지였다. 종종 프로들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호흡이 가장 잘 맞았다. 김시우에게 아버지는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동시에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2012년 9월. 부자는 미국으로 떠났다.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열리는 미국 PGA 투어의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주위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부자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해냈다. 그러나 최연소 Q스쿨 통과라는 대기록을 쓰고도 웃지 못했다. 김시우에게 불운이 찾아왔다. 만 18세 나이규정에 걸려 PGA 투어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그 전에 김시우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퀄리파잉스쿨에 출전하기 위해선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 때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해 체크해야 하는데, 김시우의 대리인이 ‘프로’라고 체크했다. 만약 ‘프로’라고 체크하지 않았더라면, 김시우는 정식으로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투어카드를 유예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2013년이 아닌 2014년부터 온전히 투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프로라고 체크한 건 우리식이다. 옛날 골프를 했던 사람들은 아마추어 골퍼가 프로테스트에 나가기만 해도 프로가 된 것이라고 여겼다. 김시우의 대리인 역시 퀄리파잉스쿨에 나가는 것을 프로테스트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프로라고 체크한 것. 이 작은 실수로 김시우는 ‘반쪽짜리 선수’가 됐고, 결국 최연소 Q스쿨 통과에도 불구하고 그해 8개 대회 밖에 뛰지 못했다.

억울한 김시우는 아버지를 졸랐다.

어려서부터 뭐든 다 해줬던 아버지였기에 자신이 처한 문제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부친 김 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다.

김 씨는 “그때 정말 억울했지만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미안했다. 그래도 묵묵히 참고 이겨낸 아들이 자랑스럽다. 오늘의 우승은 힘들고 고됐던 지난날을 견뎌낸 보상인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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