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리우! 또 다른 국가대표… 3인의 도전기]
패럴림픽 8일 개막 “인간승리 드라마 시작”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이 8일부터 19일까지 열전에 들어간다.
리우 패럴림픽은 세계 177개국 4000여 명의 선수가 23개 종목에 걸쳐 528개의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대규모 스포츠 대회다. 81명의 선수(총 선수단 139명)가 11개 종목에 출전하는 한국은 금메달 11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3개를 얻어 종합 12위를 차지하는 게 목표다. 4년 전 런던에서는 금메달 9개로 종합 12위를 차지했다.
선수들은 죽을힘을 다해 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다. 개막을 앞두고 마무리 훈련에 전념하고 있는 장애인 선수 3명(4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 ‘휠체어육상’ 홍석만 “삶 바꿔준 패럴림픽… 우직하게 달릴뿐”
아테네 베이징 런던 이어 4번째… “두바퀴의 열정, 리우로 GO”
“세 차례 출전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그것들이 모여 제 생각을, 제 삶을 바꿨죠. 좌절도 겪게 하고 희망도 갖게 하니 패럴림픽은 다양한 색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홍석만(41·제주특별자치도청)의 e메일 아이디에는 숫자 ‘4058’이 포함돼 있다. 처음 샀던 승용차 번호다. 지금은 다른 번호의 차를 타지만 첫 차를 기억하기 위해 이 아이디를 만들었다.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욕이나 불평을 들을 일도 없죠. 내 손으로 차를 몰 때의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아 이 번호를 e메일 아이디에 넣었습니다.”
홍석만은 한국 장애인 체육의 상징 같은 존재다. 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 휠체어육상 100m와 2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휠체어육상 400m에서 자신의 세계기록을 갈아 치우며 우승했다.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대회 조직위원회는 성화 봉송 대표 주자로 홍석만을 꼽았다. 장애인 체육의 세계적인 스타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제주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홍석만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또래들이 신나게 뛰어놀 때 걷지도 못했지만 홍석만은 휠체어를 탄 채 여러 운동을 즐겼다. 그가 정식으로 휠체어육상을 시작한 것은 대학에 다니던 1995년이다. 우연히 장애인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우승까지 한 게 계기가 됐다.
홍석만은 1996년 대학 졸업 후 컴퓨터 학원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이었지만 가슴속에서 잠깐 경험했던 휠체어육상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퇴근 후 늦은 밤에 인근 고등학교를 찾아 수백 바퀴씩 달렸다. 바람을 가르는 쾌감을 느끼며 그는 휠체어육상 선수로 패럴림픽에 출전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 소속 팀도, 코치도 없이 혼자서 맹훈련을 한 끝에 1999년 처음 국가대표에 뽑혔고, 방콕 아시아경기에 출전했다. 4개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등 선전했지만 2000년 시드니 패럴림픽에서는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직장까지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준비했는데…. 상실감에 2년 동안 운동을 중단했어요.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2001년 그는 제주 서귀포장애인복지관에 취업했다.
다시는 트랙에 나서지 않겠다는 다짐은 “2002년 부산 장애인아시아경기에 출전해 보지 않겠느냐”는 말에 흔들렸다. 다시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이를 더 악물었다.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손가락에선 피가 멈출 날이 없었다. 굳은살이 생겨 피가 나지 않을 즈음에는 뼈마디가 뒤틀렸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 준 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물어봐요. 어떻게 장애를 극복했느냐고. 특별한 건 없어요. 그저 핑계를 대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대충 한다는 시선을 받기 싫었어요. 누군가가 그랬죠. 이 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려면 남성보다 두 배 노력을 해야 한다고. 장애인은 그보다 더 노력을 해야 돼요. 우직하게 열심히….”
● 탁구 서수연 “절망서 구해준 ‘2.7g’… 꿈 향해 스매싱”
슈퍼모델 꿈꿨던 175cm 소녀… “앉아만 있어 내 키를 몰라봐요”
“첫 출전이라 아직은 패럴림픽이 어떨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요. 그래도 아주 좋을 것 같은 예감은 들어요. 색으로 표현하자면 반짝반짝하는 투명한 색깔? 신기하고 설레고 긴장되고…. 제게 패럴림픽은 꿈의 무대예요. 마치고 나면 뚜렷한 색이 나오겠죠?”
서수연(30·세계랭킹 1위)의 키는 175cm다. 웬만한 남성보다 크지만 그녀의 키를 알아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늘 휠체어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 큰 편인데 어릴 때는 저만 작았어요. 그래서 ‘콩새’라고 불렸대요. 초등학교 때는 평균 정도였는데 중학교 3년 동안 20cm가 넘게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 저보다 큰 친구는 드물었죠.”
늘씬한 체격에 성격이 활달했던 서수연의 꿈은 슈퍼모델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잡지에 등장하는 슈퍼모델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혼자 있을 때면 방에서 거울을 보며 워킹을 따라 하곤 했다. 고교 때까지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드러내 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2004년 대학에 입학한 뒤 그녀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알게 된 미스코리아 출신 언니가 많은 도움을 줬다.
“대학 1학년 때 슈퍼모델 대회에 출전할 결심을 했어요. 나가 보라고 권유하는 교수님들도 계셨고요. 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세를 교정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병원을 찾았습니다. 고교 때 일자 목 치료 때문에 다녔던 병원이었는데 거기서 주사를 잘못 맞았어요.”
주사액이 몸에 들어오는 순간 왼팔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튕겨 나갔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는 일시적인 마비이며 금세 좋아질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다른 의사들은 경추 손상이라는 소견을 내놨다.
“처음엔 의료 사고를 낸 의사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재활치료를 열심히 해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과 절망감은 지금도 생생해요.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과 일상생활이 다 사라져 버리니 삶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것 같고 내가 원했던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게 죽음보다 무서웠죠. 어떻게 죽을까도 고민을 했지만 혼자 힘으론 죽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었습니다.”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던 서수연은 아버지 지인의 추천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재활 겸 취미 삼아 시작했던 탁구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줬다.
“재미도 있었지만 선수 생활을 한 뒤에는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한 적도 많았어요. 지금까지 한 게 아깝기도 해서 오기로 버틴 게 여기까지 왔네요. 운동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은 게 항상 미안했기에 뭔가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TT2등급(숫자가 작을수록 장애가 심함)에서 훈련을 했던 서수연은 2008년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를 앞두고 TT3등급을 받았다. 장애가 덜한 선수들과의 대결이었기에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2013년 TT2등급으로 판정을 받으면서 그녀는 날개를 달았다.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 여자 단식에서 은메달을 땄고, 지난해 10월 아시아선수권 단식 1위, 단체 2위를 차지하며 한국 장애인 탁구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장애인체육회의 예상 금메달 11개 가운데는 서수연도 포함돼 있다.
“모든 운동선수에게 올림픽은 꿈이잖아요. 패럴림픽도 마찬가지죠. 아직 패럴림픽 탁구에서 한국 여자 선수가 금메달을 딴 적이 없다는데 제가 그 주인공이 돼서 사랑하는 엄마 목에 금메달을 걸어 드리고 싶어요.”
● ‘보치아’ 김한수 “엄마 코치 있어 든든… 희망가 부를 것”
“4년전 런던 회색빛 기억… 이번엔 파란색 만들 것”
“2012년 런던 패럴림픽은 회색빛으로 기억이 나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메달을 못 땄습니다. 첫 경기에서 초구를 던질 때 한수의 표정이 달라지더군요. 다른 대회 같으면 공 하나 실패했다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워낙 큰 대회라 긴장을 많이 했나 봐요. 이번에는 희망의 파란색을 떠올리며 리우에 갑니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들은 혼자 살아가기 어렵다. 언어와 거동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김한수(24·충남도 보치아 직장운동경기부)는 패럴림픽만의 종목인 보치아에서 가장 중증인 BC3등급 선수다. 볼링을 하듯 손으로 공을 던질 수 있는 BC1, BC2등급과 달리 입으로 보조기구를 사용하며 홈통을 통해 공을 굴린다. 혼자서는 홈통의 방향을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코치와 짝을 이뤄 출전한다. 김한수의 코치는 어머니 윤추자 씨(56)다. 윤 씨는 지독한 난산 끝에 첫아들 한수를 낳았다. 하지만 결혼 3년 만에 얻은 아들은 태어날 때 무호흡 증상을 보였고 울지도 않았다. 돌이 지나서도 걷기는커녕 목도 가누지 못했다. 출산 때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했던 게 원인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괜찮다는 병원은 모두 찾아다녔다. “뇌병변이 아니다”라고 얘기해 주는 의사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돼서야 엄마는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받아주는 일반 유치원이 없었기에 특수학교에 가려면 장애인 진단서가 필요했다. 진단서를 받은 엄마는 며칠 동안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와 함께 주몽재활원에 다니던 김한수는 5학년 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보치아를 시작했다.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윤 씨도 자연스럽게 보치아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눈짓과 몸짓으로 의사 교환을 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 초반에 탈락했고 이 때문에 김한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제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던 때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8강 문턱도 밟기 힘들었던 한수가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실력이 늘면서 우승까지 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 포기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당시에도 여러 분야에 도전을 했는데 한수가 가장 좋아했던 게 보치아였거든요. 한수의 특수학교 친구들을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에 큰 어려움을 겪더라고요. 한수는 지금 실업팀 소속으로 버젓하게 사회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회도 많지요. 다 보치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던 아들과 함께 10년이 넘게 보치아를 하면서 엄마도 세계 정상급의 코치가 됐다. 코치로서 엄마는 “반성을 많이 했다”고 했다.
“2012년 런던에서는 저나 한수나 준비가 덜 됐던 것 같아요.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긴장감 극복을 위한 심리훈련을 많이 했어요. 솔직히 4년 전만 해도 다시 출전할 수 있을지 불안했는데 다행히 힘든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며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매일 힘든 훈련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요.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패럴림픽이 있기 때문이죠.”
홍석만, 서수연, 김한수-윤추자 모자(母子). 그들에게 패럴림픽은 각기 다른 색으로 기억되고 다가온다. 희망의 무지개를 꿈꾸며 4년을 기다려온 리우 대회가 끝나면 그 색은 어떻게 달라질까.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었던 김한수,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에 앉은 홍석만, 대학생 때 의료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서수연. 그들처럼 누구라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가족처럼 누구라도 장애인의 가족이 될 수 있다. 패럴림픽이 ‘그들만의 올림픽’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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