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아침, 일본 신문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빨강은 10일 밤 도쿄돔에서 요미우리를 깨고,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한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상징색이다. 스포츠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유력 종합지들까지 북한 핵실험 소식을 밀어내고 히로시마 우승을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32면 중 8면에 걸쳐 히로시마 관련 뉴스를 실었다. 심지어 사설(社說)에까지 히로시마 우승을 다뤘다. 왜 열도는 이토록 히로시마의 우승에 열광하는 것일까?
● 울림을 주는 가난한 만년꼴찌의 반격
히로시마는 일본프로야구 12개팀 중 가장 오랫동안 우승을 못한 팀이다. 1991년 이후 우승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 1975, 1979, 1980, 1984년 우승을 차지한 붉은 군단의 쇠락은 프리에이전트(FA)와 신인드래프트 역지명(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 입단한 선수가 추후 FA처럼 프로팀을 택할 수 있는 제도) 제도가 1993년 도입되면서부터다. 유일하게 모기업이 없는 시민구단인 히로시마가 역지명 선수의 선택을 받은 케이스는 단 3번뿐이었다. 이 중 1명이 히로시마의 심장 구로다 히로키(41)였다. FA는 외부에서 단 1명도 잡아오지 못했고, 전원이 떠났다. 1998년부터 15년 연속 리그 3등 안에도 들지 못한 삼류구단이었다. 2004년 일본야구 구단 재편 격변기에는 “(긴테쓰, 다이에가 아니라) 히로시마가 사라져야 될 구단”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마쓰다 구단주를 비롯한 히로시마 프런트는 돈이 없다고 좌절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바닥부터 팀을 다졌다.
그들이 찾은 길은 신인 드래프트, 육성이었다. 히로시마에는 ‘연령선수 표’라는 것이 있다. 포지션별로 18세부터 나이대가 다른 선수를 갖춰놓은 것이다. 이 표에 근거해 팀에 부족한 포지션의 선수를 일찍부터 선별해 키워나갔다. 이 바탕 위에 2년 전, 뉴욕 양키스를 마다한 에이스 구로다가 돌아왔다. 한신으로 FA 이적했던 타자 아라이 다카히로(39)도 고향팀을 위해 현역 마지막을 바치기로 했다. 10일 우승 확정 경기 승리투수는 구로다였다. 미·일 통산 202승으로 노모 히데오를 제친 구로다는 승리 직후 아라이와 포옹하며 뜨거운 남자의 눈물을 흘렸다.
● 히로시마의 우승이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히로시마는 1949년 시민들이 돈을 모아 창설된 팀이다. 4년 전, 원자폭탄을 맞았던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야구단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독립채산제로 경영하다보니 리그 가입비, 선수 연봉조차 감당 못할 지경이었다. 이후 1967년부터 마쓰다 자동차가 경영을 맡으면서 살림이 개선됐다. 1975년부터 40년 이상 흑자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148억 엔 매출에 7억6000만 엔의 사상 최대 흑자를 봤다. 2009년 완공된 마쓰다스타디움의 힘이다. 히로시마시민들은 총 공사비 90억 엔의 야구장 건립에 보태라고 1억2600만 엔을 모금해줬다. 히로시마시는 야구장 사업을 전부 야구단에 맡겼다. 옛날 구장에서 94만 명이 최고였던 관중이 일약 21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구단 재정이 나아지자 선수 사기가 달라졌다. 귀향하는 선수들도 품을 수 있었다. 마쓰다 구단주는 당당히 “야구단은 히로시마 시민들의 공기”라고 말한다. 히로시마의 우승은 대도시에 소외됐던 지방 소도시의 반격이었다. 히로시마시와 시민들이 가꿔온 야구단이 지역경제를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