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롭고 넉넉한 한가위. 그러나 프로야구 종사자에게 추석은 남의 일이다. 선수단은 경기를 치러야하고, 프런트는 선수단을 지원해야한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구단버스 운전기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LG 트윈스 구단버스 1호차 운전기사 강영훈 씨. 1989년 MBC 청룡 시절부터 시작해 올해로 무려 28년째 LG 구단버스를 몰고 있다. 10개 구단 중 가장 오랜 세월 구단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주인공이다. 가뜩이나 막히는 추석 연휴의 귀성길과 귀경길에서 선수단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강씨를 만나 그의 인생과 추석의 추억들을 들어봤다.
● 김재박 이광은 시절부터 오지환 임찬규까지
대형버스 운전 강사를 하던 강씨는 1987년 MBC 방송국 셔틀버스 기사로 입사한 뒤 1989년 2월에 MBC 청룡으로 넘어가 구단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1990년 LG가 MBC 구단을 인수할 때 그도 선수단과 함께 LG 유광점퍼를 입게 됐다.
“제가 청룡에 왔을 때 김인식(63) 김재박(62) 이광은(61) 신언호(61) 김용수(56) 등이 현역 선수였으니까…. 그동안 수많은 선수들이 데뷔를 하고 은퇴를 했죠.”
현재 LG 내야의 핵인 오지환(26)이 1990년생이다. 임정우(25) 임찬규(24) 유강남(24) 등 오지환 밑으로는 강 씨가 LG 구단버스 운전기사를 한 다음에 태어난 선수들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의 핸들에 몸을 맡긴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1989년 MBC의 마지막 사령탑인 배성서 감독을 시작으로 LG 지휘봉을 잡은 백인천, 이광환, 천보성, 이광은, 김성근, 이순철, 양승호(감독대행), 김재박, 박종훈, 김기태, 양상문 등 총 12명의 감독을 모셨다. 그야말로 LG 역사의 산증인이다.
“산증인요? 허허. 산증인이라면 산증인이네요. 현재 이천에서 LG챔피언스파크 구장 관리를 맡고 있는 임승규 차장이 원년인 1982년에 MBC에 들어와 지금까지 있으니까, 그 외에는 제가 가장 오래 됐죠.”
● 추석연휴? 가족에겐 빵점 아빠
구단버스 기사로 이번이 28번째 추석이다. 그러나 그동안 추석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경기일정에 따라 그도 선수단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해야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넌 조상도 없냐’는 말까지 듣기도 했어요. 추석 당일에 차례나 성묘를 지내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요. 구단버스 기사들은 1년 중 120일 정도 집을 비운다고 봐야 해요. 직업상 어쩔 수 없지만, 부모님과 장인·장모님 등 어르신들 생신도 못 챙겨드려서 죄송한 적이 많았죠.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가족에겐 빵점 아빠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하면서 두 딸이 잘 자라 1명은 시집을 갔고, 1명은 대학졸업 후에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고맙죠. 또 올해는 다행스럽게 추석날 우리 일정이 홈경기에요.”
LG는 연휴가 시작되는 13일과 14일 마산에서 NC 원정 2연전을 소화한 뒤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잠실에서 KIA(15~16일), 삼성(17~18일)과 홈 4연전을 치르는 황금 스케줄을 만났다. 강 씨는 “이번엔 간만에 처가에도 가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추석 에피소드도 많다. “예전엔 고생도 많이 했죠. 난 13시간 반 정도 걸린 적이 있었는데, 선배님 중엔 인천에서 광주까지 18시간 걸린 분도 계셨어요. 요즘에야 고속도로도 많이 생기고 버스전용차로가 있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해도 이동시간은 사실 평소와 거의 비슷합니다.”
● 버스기사도 프로가 돼야죠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이에 대해 “프로정신”이라고 답했다. “28년간 구단버스를 운전하면서 전 아파본 적이 거의 없어요. 무릎 연골에 물이 차서 수술을 하느라 원정에 딱 한번 빠졌죠. 버스기사는 스페어 기사가 따로 없잖아요. 선수들만 몸 관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도 프로가 돼야합니다. 저뿐 아니라 구단버스 기사들은 경기 전 중간식을 먹고 다들 잠을 자요. 수십억, 수백억짜리 선수들을 싣고 다니는데, 야간경기 후 이동할 때 절대 졸음운전을 하면 안 되잖아요.”
구단버스 기사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그는 “난 꿈을 이룬 사람”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시내버스는 기사 자리 옆에 엔진석이 있었잖아요. 겨울에 따끈따끈해서 항상 그 자리에 앉는 걸 좋아했는데, 기사들이 ‘너 커서 뭐 할래?’라고 물어보면 전 항상 ‘버스기사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요. 어떻게 보면 전 꿈을 이룬 사람이죠. 거기다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들을 제가 모시고 다니잖아요. 또 늘 젊은 선수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저도 함께 젊어지는 것 같아 좋아요. 천직인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죽는 날까지 하고 싶어요. 하하.”
귀성길과 귀경길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그만의 노하우는 없을까. 팁 하나를 살짝 요구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명쾌했다. “아무리 바빠도 안전 운전이 최고죠. 과속보다는 무조건 안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