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란과의 맞대결에서 패하며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11일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4차전에서 전반 25분 이란의 사르다르 아즈문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졌다. 이날 경기 내내 단 1개의 슈팅을 날리는 졸전을 펼친 대표팀은 승점 7점(2승 1무 1패)으로 A조 3위가 되며 각 조 2위까지 주어지는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 확보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2차 예선 때까지 ‘갓틸리케’로 불렸던 슈틸리케 감독은 팬들로부터 ‘슈팅일개 감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란전 패배는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 2년여간 화려한 성적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곪아 터진 참사다. 전술 부재, 용병술 실패, 감독의 잘못된 진단이 합쳐진 결과다. 전문가들은 “손흥민 등 일부 선수는 2년 전보다 성장했지만 대표팀 전체의 능력은 퇴보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슈틸리케 감독은 이란전 패인을 선수에게 돌려 들끓는 비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0위권 밖 약체들을 상대한 2차 예선에서 ‘무패 행진’이라는 성적에 도취돼 전술 변화와 선수 실험의 기회를 놓쳤다. 부임 초기 이정협(울산) 등 K리거를 발굴해 성공적으로 활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외파 의존도가 높아졌다. 김대길 KBSN 해설위원은 “슈틸리케 감독은 최종 예선 1, 2차전에서도 23명의 엔트리를 모두 채우지 않고 20명만 소집하면서 선수 3명의 활용 가능성을 시험해 볼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이란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택했지만 선수 기용은 전술과 맞지 않았다. 주공격 루트는 수비 진영에서 공격 진영으로 한 번에 연결되는 긴 패스(15회)였지만 최전방 공격수로 내세운 선수는 공중 볼에 취약한 지동원(아우크스부르크)이었다. 또 수비형 미드필더로 한국영(알 가라파)만 내세워 이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하지도 못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후반전에 공격력 강화를 위해 김신욱(전북) 등을 투입하고, 수비 포지션에 변화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조직력이 흐트러지는 역효과만 가져왔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대표팀의 경기 콘셉트와 세부 전술이 모두 불분명했다. 전술이 없다 보니 최적의 선발 라인업을 구성할 수도 없다”고 평가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주 포지션이 중앙 수비수인 장현수(광저우 R&F)를 이란전에서도 측면 수비수로 기용했다. 장현수는 앞서 중국, 카타르와의 경기에서도 측면 수비수로 나섰지만 상대 공격수에게 번번이 돌파를 허용했다. 시리아전에서 부진했던 오재석(감바 오사카)도 이란전에서 측면 수비수로 출전했다. 이 덕분에 이란은 손쉽게 한국의 측면을 공략해 승리를 낚았다. 카를루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은 “한국의 측면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공략하는 게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기력이 좋지 않았던 탓에 한국을 상대할 때마다 선제골을 넣은 뒤 ‘침대축구’(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쓰러지는 것)를 구사했던 이란은 이번에는 경기 내내 한국을 몰아붙였다. 한 위원은 “측면이 전문이 아닌 선수를 지속해서 그 자리에 기용하는 패착을 저지르면서 수비뿐만 아니라 대표팀의 강점이었던 측면 공격까지 사라졌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에게도 억울한 측면은 있다. 지난해 아시안컵 준우승 때는 박주호(도르트문트)와 김진수(호펜하임)가 측면 수비수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속 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경기력이 떨어져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령탑 부임 이후 2년 동안 주전 선수의 이탈에 대비한 후보 자원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은 슈틸리케 감독의 책임이다.
이란전이 끝난 뒤 슈틸리케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게는 카타르의 세바스티안 소리아 같은 공격수가 없기 때문에 졌다”고 말했다. 소리아는 6일 한국과의 최종예선 3차전에 최전방 공격수로 나와 1골을 넣었다.
그러나 대표팀의 공격수들을 보면 슈틸리케 감독의 말은 납득하기 힘들다. 우루과이 출신 귀화 선수인 소리아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빅리그에서 뛴 경험이 없다. 아시아 무대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면 한국 대표팀에는 올 시즌 EPL 토트넘에서 5골을 터뜨리는 등 세계적인 공격수들과 경쟁하고 있는 손흥민이 있다.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은 손흥민을 두고 “EPL을 이끌어가는 공격수”라고 극찬했다. 석현준(트라브존스포르)도 소리아보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유럽 리그에서 뛰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슈틸리케 감독의 발언으로 대표팀 전체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손흥민은 “(감독님이) 다른 선수를 언급하면서까지 사기를 많이 떨어뜨리는 것은 아쉬운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전술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선수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면서 슈틸리케 감독과 선수들 간의 신뢰에 금이 갈 위기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누리꾼들은 “벤츠를 갖고 있으면서도 저렴한 차를 탐내는 격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비난이 확산되자 슈틸리케 감독은 “소리아를 거론한 것은 그 선수의 특징을 분석해 우리도 잘해 보자는 의미였는데 잘못 해석된 것 같다. 우리 팀의 공격수 자리에 다른 선수를 투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면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도 있는데 굳이 소리아를 선택하겠나”라고 해명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패배 원인으로 한국 축구의 유소년 시스템 문제도 끄집어냈다. 그는 “우리 선수들은 이란 선수에 비해 신체적인 면이 약하다. 유소년 단계부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팬들은 “명문대 입학을 위해 선생님을 모셔왔더니 중학교 때 공부하지 않아 대학을 못 보낸다는 격이다”라며 비난하고 있다. 김 위원은 “유소년 시스템이 취약했던 과거에도 한국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최근 슈틸리케 감독은 여론의 비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논란이 될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대표팀 감독으로 지금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냉정함을 되찾아야 한다는 팬들의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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