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린 지 2개월이 지났다. 겨우 두 달이 흘렀을 뿐인데, 가물가물하다. 금메달 딴 선수의 이름 정도만 기억의 언저리에 걸쳐 있을 뿐 나머지는 의미 없는 의식으로 걸러졌다. 그런데 한 가지 뚜렷한 기억은 40년 만에 메달 도전에 나선 여자배구다. 메달을 따지 못했는데도 가장 큰 이슈가 됐다. 첫 경기 한일전 승리의 기쁨도 잠시, 네덜란드와 8강 토너먼트 패배로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렸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다. 에이스 김연경 혼자만으로론 역부족이었다. 감독의 선수기용에 대한 논란, 그리고 배구협회의 엉성한 지원도 도마에 올랐다. 배구협회는 거센 후폭풍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죄인 취급당하듯 악플에 시달리며 마음의 상처가 컸을 이정철(56) 대표팀 감독을 최근 만났다. 당시 상황을 직접 듣고 싶었고,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돌멩이라도 찾고 싶어서다. 이 감독은 다행히 10월초에 끝난 KOVO컵에서 소속팀 IBK기업은행을 정상에 올려놓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우올림픽 얘기부터 꺼냈다.
● 전임 감독제 도입해야
-리우올림픽 8강전을 되돌아본다면.
“사실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카메룬전을 앞두고 숙소에서 김연경과 이효희, 김해란 셋을 불렀다. 네덜란드가 8강 상대로 결정되기 전이다. 네덜란드와 세르비아 중 네덜란드가 올라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르비아는 최근 흐름이 워낙 좋은 데다 큰 공격을 잘하는 팀이다. 이재영과 박정아 자리로 서브가 집중적으로 날아올 것으로 봤다. 상대가 스파이크 서브 때릴 때는 3명이 리시브라인에 서고, 플로터 서브 때는 김해란, 김연경 둘이 서는 걸로 시스템을 해놨다. 그런데 정작 네덜란드전에서는 연습한 게 안 나오더라. 거기서 결정적으로 리베로(김해란)가 무너졌다. 지금까지 잘해왔던 양효진도 안 통하고, 김희진도 안 통했다. 김연경 혼자 했다. 특히 네덜란드전 4세트에서 (김연경의) 노마크 다이렉트 공격이 네트에 걸리는 바람에 1점차로 줄일 수 있던 게 3점차로 벌어졌다. 거기서 안 되겠구나 싶었다.”
-박정아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같은 소속팀이어서 감독의 선수기용에 대한 비난도 많았다.
“이재영을 안 쓴 게 아니다. 첫 세트 박정아 스타팅 쓰고 무너져서 이재영 썼는데 무너졌다. 2세트 이재영 스타팅 내서 무너지고, 박정아 넣었는데 또 흔들렸다. 만약 박정아가 흔들려서 이재영을 투입했는데 통하면 경기가 풀린다. 그런데 둘 다 안 풀리면 경기가 무너진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마치 박정아 안 바꿔서 이 사달이 났다고 하더라. 절대 그런 건 아니다. 박정아가 엄청나게 울더라. 한참 애먹었다.”
-박정아에게 어떤 얘기를 해줬나.
“난 선수들에게 기사는 읽고, 댓글은 읽지 말라고 얘기한다. 배구 갤러리 이런 데 들어가지 말라고도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연락하는데, 그게 오히려 박정아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이 감독은 올림픽이 끝난 뒤 대한체육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거기에 담긴 내용을 이 감독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냉정하게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세계무대에서 뛰는 선수가 김연경이 유일하다. 터키리그는 빅리그다. 터키 최강자가 바크프방크다. 네덜란드는 귀데티 감독과 에이스인 로네크 슬뢰체스 포함 바크프방크 소속이 4명이다. 그런데도 네덜란드에 졌다고 비난하면 안 된다. 그리고 올림픽 시즌에는 협회도 KOVO와 협상해서 라운드를 줄여야 한다. 리그 끝나고 쉬다 와야 하는데, 챔피언결정전 올라간 팀은 1주일밖에 못 쉬고 입촌한다. 그러면 운동을 못 한다. 한국배구의 저변이 약한 것도 있다.”
성균관대∼금성사에서 선수생활을 한 이 감독은 지도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성균관대 코치를 시작으로 효성∼호남정유∼현대건설에서 코치를 했고, 흥국생명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공통점은 여자팀이라는 점이다. 줄곧 한우물만 팠다. 그리고 2008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여자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본선진출에도 실패했다.
-리우올림픽을 포함하면 결과적으로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게 됐는데.
“리우는 올림픽과 인연 없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한다. 선전했다. 특히 일본을 2번 이긴 점은 정말 흡족하다. 2008년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나마 베이징올림픽 탈락을 계기로 프로 구단들이 올림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런던 때도 많이 바뀌었다. 그렇게 바뀌면서 8년 뒤에 다시 리우올림픽 감독을 하게 됐으니, 2008년에 받았던 상처도 다 털었다.”
-올림픽 지휘봉을 잡게 될 후배 감독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내가 느낀 건 소속팀과 겸직은 정말 안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 소속팀 선수들도 죽을 지경이고, 나도 너무 힘들었고. 훈련 패턴을 대표팀에 맞추다 보니 소속팀 선수들이 못 쉰다. 대표팀과 소속팀 동시에 훈련시키다 보니 나도 집에 못 간다. 전임감독제를 하는 게 맞다. 감독이 누가 되든 차기 감독이 4년은 가야 한다. 차기 감독은 협회에 그 조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올 시즌 최대의 적은 부상
화제를 바꿨다. 프로배구 시즌이 시작됐다. 이젠 V리그가 더 중요하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했다.
-올 시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 했나.
“KOVO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선수를 가동했는데, 리쉘이 잘한 것 같다. 키는 실제 재보니 181cm 밖에 안 될 정도로 작지만 힘이 좋다. 의외로 수비도 괜찮다. 리쉘과 김미연이 들어오면서 팀 컬러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 둘의 역할이 KOVO컵에서 상당히 돋보였다. 그러면서 리시브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던 박정아의 부담도 줄었다. 네트 앞에서 공격력과 블로킹이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진 계기라고 본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과는 다른 배구를 약속했다. 그는 “2∼3명이 다양하게 풀어가는 배구가 가능할 것 같다. 김미연도 공격이 된다. 예전보다는 좀 더 빠른 배구를 할 수 있고, 세트플레이를 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된 것 같다. 토털 배구 또는 점유율의 적정선이 키워드다. 세팅이 됐을 때 세터와 리베로 빼면 4명이 공격할 수 있다. 전위에 3명이 있어도 후위공격을 준비할 수 있다. 만약 전위에 2명 있으면 나머지 2명 다 후위공격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 연결이 중요하다. 3명이 서브리시브를 하는 시스템이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어떤 선수를 눈여겨보면 되나.
“리쉘과 김미연이다. 처음으로 수비를 해주는 외국인선수가 왔다. 둘이 팀 컬러를 바꿀 수 있다.”
-올 시즌 라이벌로 꼽을만한 팀은.
“최대 적은 부상이다. 우리는 작년에 부상으로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부상 없이 하는 게 첫 번째다. 그리고 리듬이 깨지는 부분도 고쳐야 한다. 적은 내부에 있다.”
● 이젠 선수들 눈높이 맞춘다
이 감독은 깐깐하기로 소문났다. 훈련도 많이 시킨다. 그 덕분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도 나이를 먹다보니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스타일의 지도자인가.
“나는 스타플레이어 출신도 아니고, 잘난 게 없다. 다만 여자배구만 오래 했다. 세심하고, 모범적인 부분을 보여줘야 선수들이 받아들인다. 감독은 편한대로 하면서 우리한테만 뭐라 한다고 느끼게 하면 절대 안 된다.”
-감독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본과 원칙이다. 선수는 팀 문화에 녹아드는 게 중요하다. 하루 반짝 한다고 경기 뛰는 게 아니다. 7개월 투자해서 5개월간 리그 치르는 것이다. 그 7개월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되는데, 그 기간이 선수들 입장에선 지겹다. 그 힘들 때 30분의 훈련이 엑기스다. 그 훈련을 하는 팀과 안 하는 팀의 차이는 분명하다.”
인터뷰 말미에 이 감독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소통’을 강조하면서 “얼마 전까지 선수들이 내 눈높이에 맞췄는데, 이제 나를 선수들에게 맞추려고 한다. 감독을 변화시키는 건 선수들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