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금방 대답하기는 힘든 질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삶이 다르듯 부와 권력, 명예, 사명감 등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다소 생뚱맞지만 “나는 골프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방송평론가와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골프 마니아 김선흠 씨(69).
그는 18홀, 36홀을 돌고도 전혀 피곤함을 못 느낀다고. 보통 사람들은 방전이 되지만 되레 충전되는 느낌이란다. ‘돌아갈 집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골프장을 떠나기 싫단다.
“나에게 골프장은 에너지 충전소다. 좋은 벗들과의 라운드는 내 삶의 활력소다.”
1985년 입문해 3년 만에 싱글에 진입한 그는 무려 30년간 꾸준히 70대 타수를 들락거리고 있다. 베스트 스코어가 6언더파 66타(2003년)인 그는 칠순을 코앞에 둔 올해 1월에도 1언더파 71타를 쳤다. 모든 골퍼의 로망인 에이지슛(age shoot·자신의 나이 이하 타수)이 결코 꿈만은 아니다.
골드CC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인 김선흠 씨는 별명이 많다. ‘기록의 여전사’, ‘그린의 아마조네스’, ‘지구상에서 골프를 가장 사랑하는 여인’ 등. 그 면면을 살펴보면 그리 과장된 것 같지 않다.
홀인원 4회, 한 라운드 이글-홀인원 연속 작성(1993년 골드CC), 사이클 버디(3연속 버디에 파3, 파4, 파5홀이 모두 포함된 것) 3회, 이글 50여 회, 9홀 언더파 250여 회 등 진기록이 많다.
특히 2001년 골드CC 회원친선대회에서는 A그룹(핸디캡 0∼14)에 홍일점으로 출전해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핸디캡 6을 놓고 이븐파 72타(이글 1, 버디 1, 보기 3개)를 쳐 네트스코어 6언더파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남녀 참가자 통틀어 메달리스트(72타)를 차지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선동열 전 감독과의 대결에서는 핸디캡 4타를 받고 4전 4승을 기록 중이다. 그중 2002년에는 김 씨가 73타, 선 감독이 75타를 쳐, 실제 타수에서도 이겼다.
그는 독학으로 배운 엑셀 프로그램으로 이 모든 것을 ‘골프 일기’에 담고 있다. 동반자 이름은 물론이고 홀별 타수와 그날 라운드의 특이점까지.
“최근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처럼 마치 골프의 신(神)이 나를 돌봐주고 있는 것 같다. 객관적인 실력보다 대단한 기록, 좋은 스코어가 나온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골프에 왕도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엄동설한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연습장과 헬스장에 가고, 시즌 중에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라운드를 한다.
김선흠 씨는 퍼팅 OK, 멀리건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원칙주의자다. 그 때문에 동반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골 동반자들은 함께 라운드 할수록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골프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됐다며 좋아한다고.
그런데 원칙과 매너를 고집하다 크게 후회한 ‘사건’이 있었다.
“절친한 사이인 탤런트 고두심 씨랑 자주 골프를 쳤다. 내가 주로 픽업했는데, 미리 집 밖에 나와 있지 않고 항상 늦게 나왔다. 화도 났고 늑장 버릇을 고쳐줄 셈으로 차 트렁크에 두심이의 골프백을 실은 직후 두심이가 타기도 전에 출발해 혼자 골프장으로 가버렸다.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두심이는 그날로 골프를 딱 끊어 아직까지 안 치고 있다. 내 골프 인생 최대의 과오다.”
이에 대해 고두심 씨는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녹화가 길어져 밤늦게 귀가한 날은 아예 골프 옷을 다 챙겨 입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연기자로서 평생 시간에 쫓겨 사는데 골프가 스트레스가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선흠이와는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이다. 골프만 빼고 뭐든 ‘쿵 하면 쾅 하며’ 매사에 잘 통한다”고 말했다.
김선흠 씨는 자신이 회원인 골프장을 사랑하는 마음도 싱글급이다. 그의 골프백에는 호미와 톱이 들어있다. 라운드 중 짬날 때마다 잡초 뽑고 담배꽁초 줍고, 코스 주변 나무 가지치기를 한다. 골드CC 관계자들이 “직원인지 회원인지 헷갈린다”고 말할 정도다.
“골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지인들의 동반 라운드 소감 중 김선흠 씨가 가장 흐뭇해하는 말이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뜻이다. 송년회 때 애용되는 건배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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