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예상 못한 ‘대역전극’이었다. 그 덕분에 필자는 고깃집(燒き肉屋)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일본 준우승, 한국 예선 탈락)처럼 일본 스포츠팬의 주목을 모은 건 스모 대회(大相撲)였다. 매회 ‘15일간 전쟁’이 연간 6회가 열린다. 올해 봄 시리즈에서 키세노사토(稀勢の里)가 드디어 최고 자리인 요코즈나(橫綱)에 오른 것이다.
그동안 스모는 몽골 군단(선수들)이 휩쓸어 온 게 사실이다. 일본 출신의 사람이 ‘요코즈나’나 다음 순위인 ‘오오제키(大關)’로 우승 또는 우승에 준하는 성적을 2회 연속 올린 것은 무려 19년 만이었다. 한국의 씨름에서 외국인이 우승을 독차지해왔다고 상상한다면 일본 스포츠팬의 마음이 어땠을까.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본 출신의 요코즈나를 원하는 분위기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키세노사토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우선 강하다. 몽골 출신의 절대적인 요코즈나 하쿠호(白鵬)에 16승을 거두고 있는 일본 출신 선수는 키세노 사토 뿐이다(물론 패배도 43번이나 된다). 그는 몽골 군단의 일각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존재로 불린다. 반면 우승, 요코즈나 승진이 걸린 승부처에서는 왠지 모르게 너무 약하다. 부족한 자식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생길 정도다.
이런 스모임에도 정공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스모 팬이 좋아하는 이유다. 스모는 알려진 대로 서로 상대를 잡고 시작하는 씨름과 달리 구분된 선 안에서 거리를 두고 시작된다. 서로 몸을 부딪치는 것은 기본이다. 상대의 돌진을 옆으로 피하는 등의 변화된 기술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경량급 역사 외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키세노사토 역시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힘으로 승부한다. 그 모습이 유쾌통쾌한(すがすがしい) 것이다.
그런 우직한 키세노사토가 1월의 시리즈에서 마침내 첫 우승을 이루고 요코즈나가 됐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3월에도 막판에 몰려도 냉정하게 상대를 제압했다. 표정도 당당해보였다.
12라운드까지 전승 가도. 하지만 호사다마였을까. 13일 째 몽골 출신의 요코즈나 하루마 후지(日馬富士)에게 밀려 쓰러졌다. 경기장 밑으로 떨어져 왼쪽 팔 근육을 다쳤다. 가벼운 상처라고 볼 수 없었다.
14일째에도 키세노사토는 경기에 나섰다. 몽골 출신의 요코즈나 카쿠류(鶴龍)를 상대가 아무것도 못한 채 뒷걸음질만 했다. 장내의 팬들은 그런 키세노사토가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대회 마지막 날은 몽골 출신 오오제키 테루노후지(照ノ富士)와의 일전이었다. 1패인 테루노후지에 키세노사토가 이기면 2패 동률이 돼 우승 결정전이 열리지만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TV 해설자는 말했다.
그러나 키세노사토는 이겼다. ‘금단의 변화 기술’을 사용해 오른 팔로 상대를 떠다밀었다. 이어진 우승 결정전. 키세노사토는 테루노후지에 다시 오른 팔 하나로 맞섰다. 그리고 다시 승리. “이번에는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는 1월처럼 팬들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냈다. 일본과 몽골을 넘어 ‘순수하게 좋은 것을 봤다(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승부였다)“는 감회가 휴일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를 채웠다.
이 날은 사실 필자의 생일이기도 했다.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집 부근의 고깃집을 예약했다. 키세노사토가 패한다는 전제로 예약을 했지만 (우승 결정전까지 열려)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리를 확보한다는 생각으로 고깃집에 전화를 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몇 번을 연락한 끝에 간신히 통화가 됐다. 그곳 역시 스모 경기 때문에 가게 도착이 늦는다고 연락한 예약 손님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이날 불고기(燒き肉)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맛있었다.
○나카고지 토루는?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 스포츠부 편집 위원. 1968년생. 대학시절까지 축구 선수였다. 입사 후에도 축구를 중심으로 취재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로 한국 측을 담당했다. 현재는 스포츠에 얽힌 폭력이나 사고, 그리고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길 환경을 어떻게 만드는지 등을 폭넓게 취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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