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자두)나무 아래에선 갓 끈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을 지날 때는 신발 끈을 동여매지 말라.’ 자주 들어본 속담이다. 그런데 무슨 뜻일까? 누군가로부터 오해받을 만한 상황에선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내가 실제로 자두나 참외를 따지 않았어도 딴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우리 형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여러 범죄들에도 이와 비슷한 취지를 담은 것들이 있다.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결과가 발생할 위험성만 있으면 처벌하는 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범죄들을 위험범(危險犯) 또는 위태범(危殆犯)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실제로 결과가 발생해야만 처벌하는 범죄가 있는데, 이것은 침해범(侵害犯)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상해죄는 ‘사람의 신체에 대한 손상’이라는 결과가 실제로 발생해야 한다. 누군가를 때릴 상황을 만든 것만으로는 처벌되지 않는다. 반드시 상해라는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 즉, 침해범이다. 반대로 업무방해죄는 ‘공정한 업무집행이 방해될 위험성’만 있어도 범죄가 성립한다. 실제로 공정한 업무집행이 방해되지 않아도 성립한다. 위험범인 것이다.
● KBO리그 규정에도 위험범 징계 규정이 있다!
그런데 이런 위험성만으로 처벌하는 취지의 규정이 형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KBO리그 규정 벌칙내규에도 같은 취지의 규정이 있다. 심판에 대한 징계와 관련해 제8호에 ‘구단 사무실 또는 구단 버스에 들어가서 환담을 나누거나 구단 관계자와 친목적인 언행을 하였을 때’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징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아무런 부정행위 없이 구단 사무실이나 버스에 들어가 단순히 이야기만 나누었는데도 징계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왜 그럴까? 상대팀이나 팬들이 봤을 때 적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판 판정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심판에게는 경고 또는 100만원 이하의 제재금으로 징계가 이뤄질 수 있다.
● AFC 챔피언스리그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올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선 지난해 우승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AFC 출전관리기구(Entry Control Body)로부터 출전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해당 구단은 스카우트가 심판들에게 돈을 준 것이 문제가 됐다. 적용된 혐의는 국민체육진흥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었다. 스카우트와 심판이 경기에 관해 부정한 청탁과 함께 돈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해당 스카우트는 수사와 재판 과정을 통해 유리하게 판정해달라는 청탁은 전혀 없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축구계 선배로서 용돈이나 생활비로 쓰라고 호의로 준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구단에선 승부조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출전금지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AFC의 출전권 박탈 결정을 법적으로 설명하면, 바로 위험범의 법리로 설명할 수 있다. 법원도 명시적으로 ‘유리한 판정을 해달라’는 청탁이 없었던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해당 스카우트와 심판 사이에는 평소 특별한 교류가 없었다. 돈을 거래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평소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200만원, 300만원씩이나 되는 큰돈을 용돈으로 줄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돈을 준 날들 중에는 경기 바로 전날도 포함돼 있었다. 법원은 이런 사정들에 주목했다. 반드시 명시적으로 청탁을 하지 않더라도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유리하게 판정해달라’는 청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판이 경기를 운영할 때 불공정한 판정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의심을 살 만할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통상적 의미의 ‘승부조작’이 입증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공정한 판정이 이뤄지지 않았을 위험성은 충분한 것이다.
● 공정하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오얏나무와 관련한 우리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KBO에서 괜히 징계 규정을 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공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공정하게 보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