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야구 최초로 몸값 100억 원 시대를 열며 삼성에서 KIA로 이적한 최형우(34). 그의 야구 인생 절반은 ‘꽃길’과는 거리가 멀다. 오랜 무명 세월을 거쳐 2008년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잘 살린 삶이다.
지난해 타격 3관왕(타율, 타점, 최다안타)을 차지하고 팀을 옮긴 최형우는 이번 시즌에도 여전히 국내 최고 왼손 타자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8일 현재 타율 0.328(11위), 출루율 0.445(1위), 장타력 0.642(2위), 홈런 14개(4위), 안타 66개(10위), 41타점(4위), 40득점(7위) 등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 부문에서 상위에 올라 있다. 볼넷 40개(1위) 기록은 투수들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입증한다.
KIA는 4번 타자 최형우를 축으로 나지완, 이범호, 안치홍, 김선빈 등을 앞뒤로 포진시켜 공포의 타선을 구축했다. 득점권 타율이 높고 장타력까지 갖춘 최형우 앞에서 어떻게든 진루를 하려는 KIA 타자들의 집중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이른바 ‘최형우 효과’다.
7일 광주에서 만난 최형우는 ‘국도 건설 현장 아르바이트에서 100억 타자가 되기까지’ 롤러코스터 같았던 지난날을 되짚었다. 최형우는 “내 야구 인생의 절반에 와 있는 것 같다. 10대나 20대 초반은 ‘산전수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만으로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남은 야구 인생 절반도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힘들었던 ‘과거’는 열정을 식지 않게 하거나 나태를 막는 특효약이 된다. 그중에서도 전주고를 졸업한 2002년 신인 드래프트 2차 6라운드(전체 48순위)로 삼성에 입단하고 나서 받은 첫 월급은 자신의 현주소와 돈의 가치를 일깨워준 의미 있는 기억이다.
“첫 달 (월급) 190만 원이 통장에 찍혔어요. 그저 그 돈에 맞춰 생활하고 야구장에서 뛰는 게 즐거울 때였으니까요.”
최형우는 2005년 삼성에서 방출돼 2006년 경찰청에 입단하기까지 야인 생활을 했다. “고속도로, 국도 건설 현장에서 일당 몇만 원에 일을 했어요. 야구 인생은 아예 끝났다고 생각했죠. 경찰청 팀이 생기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살았을 겁니다.”
그때 공백은 지금도 뼈저리게 자기 발전과 기술적 진화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됐다.
최형우는 왼손 장거리포 타자로는 흔하지 않은 타격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왼손 거포들은 오른발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거둬들이면서 허리의 회전력을 주로 활용해 타구를 멀리 보내는 ‘오픈 스탠스’ 자세를 많이 선호한다.
하지만 최형우는 방망이를 헬멧 부근에서 뒤로 눕혀 잡고 양다리를 평행하게 디뎌 놓은 상태에서 오른발 레그킥(타격할 때 발을 크게 들었다 내리는 동작)을 동반해 스윙을 한다. 체중 이동이 좋지 않으면 자세가 무너지기 쉽다. 방망이를 눕혀 잡고 반동을 주는 건 스윙이 돌아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최형우는 임팩트까지의 스윙 속도를 키우고 높은 코스 공략의 약점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몸에 맞는 지금의 자세를 다져왔다.
최형우는 “박흥식 코치께서만 아는 사실인데 내 타격의 핵심은 공을 맞힐 때 공에 스핀(회전)을 많이 줘 비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도 놀랄 때가 많은데 이론적으로 깨친 건 아니다”면서도 “타격 자세는 완성이라는 건 없다고 본다. 죽을 때까지 내 몸에 맞는 자세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야구 선수로 장수하고 싶다는 최형우는 “올해도 910g짜리 무거운 방망이를 쓰고 있다. 주변에서는 800g대 가벼운 방망이로 바꾸라고 하는데 아직 힘이 떨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42세까지는 현역에서 뛰고 싶다”며 웃었다.
오늘의 최형우를 있게 한 3가지로 ‘묵묵히 곁을 지켜준 가족’, ‘실수하면 가차 없이 지적을 하는 친구들’, ‘힘들었던 삶이 가져다준 생각의 깊이’를 꼽은 최형우가 가장 원하는 장면은 홈런을 치고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것도, 대량 타점을 올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타석에 섰을 때 ‘최형우한테 뭔가 나오겠다’는 말이 늘 귀로 들어오면 좋겠어요. 항상 기대감을 주는 선수였다면 나중에 내 야구 인생을 돌아볼 때 뿌듯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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