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네가 가라, 우루과이’ 지금과 너무 달랐던 제1회 월드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3일 14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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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역사상 첫 승을 거둔 나라는 어디일까요?

정답은 미국입니다. 1930년 오늘(13일) 미국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에스타디오 파르케 센트랄에서 벨기에를 3-0으로 물리쳤습니다. 당시 월드컵에는 개막전 개념이 없어 이 경기와 같은 시각 프랑스-멕시코 경기도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프랑스가 4-1 승리를 거뒀습니다.

미국과 벨기에가 맞붙은 역사상 첫 번째 월드컵 경기.
미국과 벨기에가 맞붙은 역사상 첫 번째 월드컵 경기.


사상 첫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과 프랑스는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월드컵 출범을 도왔습니다. 월드컵 이전에 전 세계 축구인들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세계 대회는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런데 1932년 로스엔젤레스(LA)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축구를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했습니다. 대신 미식축구를 시범 종목으로 넣었죠. 이에 반발해 프랑스 출신인 쥘 리메 FIFA 회장(1873~1956)이 발벗고 나서 만든 대회가 바로 월드컵입니다.

리메 회장과 월드컵 초대 우승 트로피 ‘쥘 리메 컵’.
리메 회장과 월드컵 초대 우승 트로피 ‘쥘 리메 컵’.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통산 3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 트로피를 영구 보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 트로피는 1983년 도난 당했고 범인 일당은 이 트로피를 녹여 금괴로 팔아버렸습니다.

제1회 FIFA 월드컵 포스터.
제1회 FIFA 월드컵 포스터.
이제 FIFA 월드컵은 각 나라 축구 대표팀이 서로 못 나가 안달인 대회지만 제1회 대회 때는 서로 ‘네가 가라, 우루과이’ 모드였습니다. 리메 회장이 사비를 털어 유럽 각국 축구협회를 찾아 다니며 “제발 선수들을 보내 달라고” 로비를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직 항공 교통이 발달하기 전이라 유럽에서 남미에 있는 우루과이까지 배를 타고 가려면 몇 주씩 걸렸거든요.

지역 예선도 없어서 참가 신청만 하면 대회에 나설 수 있었는데도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같은 축구 강국이 모두 끝내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대신 프랑스와 루마니아, 벨기에, 옛 유고슬라비아 등 4개국이 참가하면서 첫 번째 대회는 ‘아메리카컵’이 아니라 ‘월드컵’으로서 구색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FIFA에서 유럽 여느 나라 대신 우루과이를 1회 대회 개최지로 선정한 이유는 뭘까요? 일단 1930년은 우루과이가 브라질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또 당시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핌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2연패를 차지한 축구 강호였습니다. 게다가 우루과이 정부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도 교통비, 숙박비를 비롯해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했으니 FIFA로서는 우루과이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대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단.
당대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단.


이 대회에는 지역 예선뿐만 아니라 없는 게 참 많았습니다. 심판이 부족해 각국 감독이 돌아가며 다른 나라 경기 때 선심을 맡았습니다. 울리세스 사우체도 볼리비아 대표팀 감독(1896~1963)은 아르헨티나-멕시코 경기 때 주심을 보기도 했습니다. 사우체도 감독은 이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3개 불었습니다. 보통은 3경기에 한 번만 불어도 페널티킥 선언이 많은 심판으로 손꼽힙니다.

앞 가슴에 ‘우루과이 만세(Viva, Uguruay)’라고 쓴 유니폼을 입고 기념 촬영 중인 볼리비아 대표팀.
앞 가슴에 ‘우루과이 만세(Viva, Uguruay)’라고 쓴 유니폼을 입고 기념 촬영 중인 볼리비아 대표팀.


볼리비아 선수들은 실제로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월드컵에서 국가간 경쟁의식이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대표팀에는 감독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리메 회장 모국이니까 리메 회장 체면을 생각해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단, 가스통 바루 대표팀 감독(1883~1958)은 개인적으로 대회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라울 카우드롱(1883~1958) 코치가 이 대회 때 대신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바루 감독이 자기 자리로 복귀했습니다.

이 대회 준우승팀 아르헨티나에는 주장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마누엘 페레이라(1905~1983)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장으로 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페레이라는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시험을 봐야 한다며 대회 도중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게 아르헨티나에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페레이라를 대신해 출전한 기예르모 스타빌레(1905~1966·사진)가 8골을 넣으면서 월드컵 초대 득점왕에 올랐거든요.

스타빌레.
스타빌레.

첫 번째 월드컵에는 공인구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서로 자기 나라 공을 쓰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바빴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맞붙은 결승전 때는 결국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공,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에서 만든 공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공을 쓴 전반에 1-2로 밀렸지만 자기네 공을 쓴 후반전에 3골을 넣으면서 결국 4-2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바라요.
이 결승전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뛰었던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2010년 8월 30일 10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100번째 생일이던 그해 2월 5일 FIFA와 인터뷰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이 결승전 패배를 꼽았습니다. 바라요를 마지막으로 이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는 그 누구도 현재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 첫 출전한 건 이로부터 24년이 지난 1954년 스위스 대회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헝가리에 0-9로 패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는 축구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월드컵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대해 리메 회장은 “지금은 한국이 처참하게 무너졌다고 해도 수십 년 뒤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런 주장 자체가 월드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축했습니다. 그 예상대로 한국은 이제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나라가 됐고, 월드컵은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에 이어 두 번째로 TV 중계권료가 비싼 스포츠 이벤트가 됐습니다.

1930년 전 오늘 첫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월드컵이 이렇게 대단한 대회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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