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으로 승진한 뒤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삼성 모 계열사의 ㅈ씨. 그는 곧바로 골프 레슨부터 시작했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이 극히 드물던 1980년 대 말의 일이었다. 하루 3갑 넘게 피던 담배를 어느 날 끊었을 정도로 남다른 결단력을 지닌 ㅈ씨의 성미는 골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일개 부장인 그는 직급의 벽을 무시하고 회사 최고 경영자급 상사들에게 “최고의 레슨 프로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렵게 프로를 모신 후 출근 전, 퇴근 후 하루 두 번씩 고강도 레슨을 받고 추가로 수백 번의 스윙 연습도 빼먹지 않았다.
입사 후에 거의 운동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골프에 열중하면서 ㅈ씨의 몸이 탈이 났다. 온 몸이 삐걱거리고 특히 스윙을 할 때마다 갈비뼈 부분이 심하게 결렸다. 고민하던 ㅈ씨에게 누군가 “그 고비만 이겨내면 돼. 이열치열치열이니 스윙으로 아픈 부위는 스윙으로 풀어야 하네”라는 조언까지 해줬다.
ㅈ씨는 더 가열차게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러다보니 골프채를 쥐기만 해도 손이 찌릿찌릿했고 평소에도 상체를 쭉 펴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스윙을 한 번 하려면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의지와 집념의 사나이인 ㅈ씨는 이를 악물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러다보니 정말 아픔이 조금씩 가시는 듯했다.
ㅈ씨의 출국 날짜가 다가왔다.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간 그는 의사에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갈비뼈에 금이 갔었네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붙어버렸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그는 회사 내에서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골프에 매진한 사나이’로 불려 유명세를 탔다.
삼성 조직원이던 그에게 골프는 ‘도전하고 성취야 할 목표물’이었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모를 정도로 온몸을 던지게 만든 원동력은 바로 ‘경쟁’이다. 회사에서 무엇을 해도 삼성에서는 피 터지는 경쟁을 벌여야한다. 회사 상사나 동료들과 친목 도모를 위해 골프장에 간다 해도 치열하게 스코어 경쟁을 벌인다. 한국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흔히 통용되는 멀리건과 컨시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악착같이 벌타를 매기고 악착같이 소소한 돈 내기를 한다. 이런 경쟁은 골프 뒤의 술자리로까지 이어진다.
반면 현대차그룹 조직원들에게 골프가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이 곳에서 골프는 공동체 의식의 발현이나 단체 행동의 일환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현대그룹을 건설했을 때부터 직원들 먹이는 일에 치중했기에 현대차그룹도 이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현대 계열사는 어느 장소에 건물을 지어도 제일 먼저 직원들 밥을 먹인다고 한다. 1원 한 푼 없는 맨손 쌀집 점원으로 시작해 대제국을 이룬 고 정주영 회장에게 직원들은 문자 그대로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이자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고로 현대에서는 ‘함께 모여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게 중요하다. 식당 음식의 맛은 그 다음이다. 음식 맛을 두고는 불평하면 자칫하면 조직 자체나 단합 행동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찍힐 수도 있다.
현대차그룹 임원들에게 골프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회식에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일과 비슷하다. 누가 더 높은 점수를 올렸는지, 누가 드라이버 비거리를 더 멀리 보냈는지, 누가 숏 게임을 잘했는지 같은 경쟁은 별 의미가 없다.
삼성과 현대 양쪽에서 근무해본 내 경험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임원들은 타 그룹, 특히 삼성에 비해 골프 치는 횟수 자체가 적다. 그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일지 모르나 그래서 임원들의 평균 타수도 높은 편이다. 골프는 밥 먹는 것처럼 한 번씩 모여 결속력을 확인하고 유대감을 높이는 행위이니 자주 칠 필요도, 점수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창업자 및 그룹 총수의 골프에 대한 태도와 행동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골프라는 운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1950년대부터 골프를 시작해 1968년 아예 안양골프장(현 안양 베네스트)을 만든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타계할 때까지 매주 2~3회 골프를 즐겼다. 수시로 새로운 골프채와 서적을 구입하며 연구하기도 했다. 아들 이건희 회장 역시 골프와 럭비를 ‘삼성의 전용 스포츠’라고 거듭 강조했다.
반면 현대 창업주 정 회장은 1970년대 말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맡으며 골프를 본격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골프 자체를 즐긴다기보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업무적 목적이 우선이었다. 현대차그룹 내에서의 골프에는 아직도 그런 창업주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 있다.
삼성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에서 현대차그룹 ‘이노션’으로 자리를 옮길 때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사전에 확실하게 알렸다. 골프를 치라고 권유하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한 셈이었다. 삼성에서도 전체 임원 워크숍에서 골프 시간이 있을 때 혼자서 다른 일정을 만들어 놀던 나였다.
현대로 옮기면서 이런 나의 생각도 조금씩 흔들렸다.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조직 전체의 결속이 강조되는 회사에서 내가 ‘반(反)조직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40대 중반이어서 골프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 역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나이보다 늦게 골프를 시작한 임원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필드에 섰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스코어가 얼마인지는 하등의 문제가 아니니 바로 시작하라”는 상사의 말은 정말 거역하기 힘들었다. 간신히 ‘골프 처녀성(golf virginity)’를 지키기는 했지만 현대차그룹에서 일할 때 생애 통틀어 가장 골프장에 물리적으로 가깝게 갔던 것 같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골프 문화도 좀 섞였으면 좋겠다. ‘경쟁’과 ‘결속’이라는 두 기업의 뚜렷한 DNA가 오늘날의 성공을 일군 원천이긴 하지만 골프 점수, 골프 지식, 술자리 주량까지 경쟁하는 삼성의 경쟁 강도는 좀 완화됐으면 한다. 동시에 현대차그룹에서는 가끔 열외를 인정하는 문화가 늘어났으면 한다.
골프는 물론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두 그룹의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더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 필자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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