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타자 이승엽의 23년’을 말한다 ① 끝의 시작에서….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8월 11일 05시 30분


삼성 이승엽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 역시 23년간 숱한 시련과 마주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으려는 근성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릎 꿇지 않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삼성 이승엽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 역시 23년간 숱한 시련과 마주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으려는 근성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릎 꿇지 않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국민타자’ 이승엽(41)이 마침내 은퇴한다. 199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뒤로 23년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불멸의 대기록과 영광의 기억이 함께했다. 한 시절을 주름잡던 대스타들을 보며 그가 성공을 꿈 꾼 것처럼, 지금은 ‘미래의 이승엽’을 머릿속에 그리는 선수들이 넘쳐난다. 40년을 바라보는 KBO리그, 100년을 훌쩍 넘긴 한국야구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타자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동아는 21세기 한국야구의 최고 스타로 기억될 이승엽의 발걸음을 매주 주말판을 통해 되돌아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한때 홈런경쟁을 펼쳤던 심정수와 이승엽(오른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한때 홈런경쟁을 펼쳤던 심정수와 이승엽(오른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① ‘끝의 시작’에서…비범함을 꿈꾸는 평범한 이들에게

이승엽은 11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펼쳐지는 한화전을 시작으로 ‘은퇴 투어’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자를 모든 팬들의 따뜻한 환대와 축하 속에 떠나보내려는 KBO와 10개 구단의 공동작품이다. 메이저리그의 대스타들이 레전드로 남기 전에 치르는 명예로운 ‘의식’이 KBO리그 최초로 그의 은퇴에 맞춰 진행된다. 가수 이문세가 불러 사랑 받았던 노래의 제목을 빌리자면 ‘끝의 시작’인 셈이다. 이제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크게 주목받게 됐다.

한국프로야구에서 15년, 일본프로야구에서 8년을 뛰는 동안 이승엽이 남긴 발자취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두 차례씩 출전한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보여준 활약상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몰래 흘린 그만의 숱한 땀과 눈물도 배어있다. 그 역시 늘 ‘비범해지기’를 원하는 평범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감춰진 갈등과 역경, 또 이를 극복하려던 노력까지 살펴봐야 ‘국민타자의 23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1997년 MVP에 오른 이승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1997년 MVP에 오른 이승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절실한 의지

이승엽은 프로 데뷔 3년째인 1997년 이른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홈런(32개), 최다안타(170개), 타점(114개)의 3개 부문 1위에 오르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까지 거머쥐었다. 전설의 실질적 출발점이다.

당시 삼성 타선은 이승엽과 함께 양준혁이 이끌고 있었다. 양준혁도 그 해 타격 3위(0.328), 최다안타 5위(145개), 홈런 공동 2위(30개), 타점 2위(98개)를 기록했다. MVP급 성적이다. 삼성의 미래가 둘의 손에 달려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14일 실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삼성은 해태에서 특급 마무리 임창용을 데려오는 대가로 투수 곽채진, 황두성과 함께 양준혁을 넘겼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의 ‘서진정책(해태·쌍방울 핵심선수 연쇄영입)’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삼성 팬들의 실망과 원성은 대단했다. 삼성 선수단의 동요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종두, 김성래, 강기웅 등 그 무렵 팀을 상징하던 대스타들이 차례차례 이적하거나 타의로 유니폼을 벗은 뒤였다. ‘헐크’ 이만수마저 1997년을 끝으로 은퇴한 터라 더욱 그랬다. 삼성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는 사실상 이승엽이 유일해졌다.

이승엽으로서도 부담이 될 법한 상황전개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의 일을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인식하고 있을까. “지금도 후배들에게 얘기하는 내용인데, 경기장 안에선 선후배가 따로 없다. 물론 사적으로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경기장 안에선 누구나 다 이기려고 야구를 할 뿐이다. 양준혁 선배를 비롯해 여러 선배들이 빠져 나갔지만, 그런 생각으로 야구를 했다. 또 그런 상황이라 ‘내가 잘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성공을 향한 열정, 최고가 되고픈 욕심, 조연이 아닌 주연을 바라는 의지가 이승엽을 움직였고, 오늘을 낳았다. 슈퍼스타라 ‘품위유지’가 더 익숙할 수 있겠지만, 그는 점잔을 떨지 않았다. 이렇게 덧붙였다. “늘 야구선수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야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고, ‘이 길로 성공하자’는 생각뿐이어서 더 노력했던 것 같다.”

지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스리런 홈런을 친 이승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지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스리런 홈런을 친 이승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아름다운 6년’을 더할 수 있었던 고독한 결단

일본에서의 8년은 이승엽에게 어떤 의미일까. ‘영욕(榮辱)이 교차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른다. 일본 최고의 인기구단 요미우리와 함께한 5년이 특히 그렇다. 초반 2년은 ‘꽃길’, 후반 3년은 ‘흙길’이었다. 야구선수가 된 뒤로 그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감을 느끼던 때였다. 8년간 통산 성적은 타율 0.257에 159홈런 439타점이다.

2011년 10월 이승엽은 고단했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복귀를 결심했다. 당초 2년이었던 오릭스와의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삼성으로 돌아왔다.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2003년 12월 지바롯데 입단을 결정했을 때보다 더 결연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미 그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가 난 상태였다.

이승엽이 복귀를 확정했을 당시 삼성 사령탑은 류중일 감독이다. 그러나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선동열 감독이 삼성 지휘봉을 쥐고 있었다. 삼성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두 차례나 선사한 선 감독은 2010년 요미우리에서 타율 1할대의 부진에 빠져있던 이승엽의 삼성 복귀설이 나돌자 반대의사를 명확히 했다. 표면적으로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승엽이 공개적으로 복귀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선 감독은 완강했다.

선 감독의 사퇴와 류 감독의 취임으로 이승엽이 돌아올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갖춰졌다. 그러나 복귀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8년이라는 세월 또한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전성기가 지났다. 일본에서 좀더 머문 뒤 은퇴를 택했더라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처지였다. 복귀할 명분도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이승엽은 고민 끝에 복귀를 결심했다.

삼성 이승엽.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삼성 이승엽.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그 ‘순간의 선택’에 대해 이승엽은 지금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는 감사의 마음부터 전했다. “(삼성이 복귀 의사를 받아줘) 고맙게 생각했다. 그 전 감독님(선동열)도 그렇고, 나의 복귀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2010년 12월) 오릭스와 2년 계약을 하면서 집사람에게도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했다.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보름 뒤 류중일 감독님으로 바뀌었다. ‘계약을 조금만 늦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웠다. 그런데 (1년 뒤) 복귀했으니 감사했다.”

2012년부터 어느덧 다시 6년이 흘렀다. 이승엽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세 차례 더 맛봤다. 만약 복귀하지 않고, 아니 복귀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더라면 어땠을까. 영광스러운 마무리도, 성대한 작별의식도 모두 그를 비켜갔을 것이다.

삼성에서의 후반부 6년은 이승엽을 한층 더 성숙하게, 또 한층 더 위대하게 만들어줬다. 삼성과 이승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던 것이다. “삼성에서만 15년이다. 나 역시 (구단에 감정이) 안 좋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복귀함으로써 그런 일들도 다 지워졌다. (복귀 결심이) 안 좋게 얘기하면 욕심인데, 그래서 더 최선을 다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으니,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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