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안타까운 부음을 접했다.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로 만든 기틀을 마련해 ‘전자업계의 큰 별’로 불리던 고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의 별세 소식이다.
삼성전자와 삼성정밀,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등 삼성그룹에서 최고경영자(CEO)로만 약 30년을 재직한 강 회장. 1989년 5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신입 공채로 삼성에 입사한 필자에겐 눈 한 번 마주치기 어려운 거목이었다. 그런 고인과 필자는 인연이 있다. 엘리베이터 속의 CEO와 신입
삼성그룹 입사 4개월, 삼성전자로 배치 받은 지 약 2개월이던 1989년 9월 어느 날 아침. 강진구 회장은 약 1년 전인 1988년 11월 1일 갓 출범한 삼성전자의 대표이사 부회장이었다. 그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당시 삼성전자는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본사 건물의 9층부터 20층까지를 썼다. 아직도 필자가 근무하던 홍보실은 17층, 대표이사 부회장실과 종합기획실이 20층에 있었다는 점도 생생히 기억난다.
여느 출근 시간처럼 로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갑자기 모세가 홍해 바다를 건널 때처럼 혼잡한 인파가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보무도 당당하게 강 대표이사가 리셉션 데스크 여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엘리베이터에 혼자 태워 올려 보내려던 여직원을 가볍게 제지했다. 다른 사람을 더 태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바쁜 시간, 그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이에 강 대표이사는 직접 직원들에게 타라고 손짓을 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한 신입사원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해당 신입은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필자다.
바로 옆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다른 사람들은 우르르 옆 엘리베이터로 몰려갔다. 결국 당시 20대 중반 필자와 60대 초반이던 강진구 대표이사 단 둘이 한 엘리베이터에 타게 됐다.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답답하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필자는 그 어색함을 피하려 말을 건넸다. “20층 가시죠?”
다른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그는 약간 놀라며 “응, 응” 하고 짧게 답했다. 홍보실이 있는 17층에서 먼저 내리며 필자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강 대표이사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응, 응”이라고 답했다.
약 5초 정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갖 생각이 스쳤다. 대표이사가 그렇게 타라고 권유하는 데도 왜 아무도 타지 않는지, 자신이 그렇게 손짓을 하는데도 신입 1명을 제외하면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대표이사의 느낌은 어떨지 궁금했다. 바보처럼 “20층 가시느냐”는 뻔한 말을 한 나 자신에게도 약간 화가 났다.
옆 자리 선배에게 얘기하자 선배는 “그 좋은 기회를 그렇게 날려 버렸느냐”고 타박했다. 생각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만약 CEO와 단 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CEO가 좋아할까.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직도 답을 잘 모르는 질문이다.
CEO와의 골프
평범한 직장인은 5~10초 정도에 불과한 엘리베이터를 CEO와 같이 타는 일도 망설인다. 최소 4~5시간을 같이 보내는 골프는 어떨까. 임원이 되고 보니 CEO는 그 몇 시간을 부하를 평가하는 기회로 쓴다는 걸 알게 됐다.
필자가 오래 모셨던 모 CEO의 일화다. 큰 키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는 골프를 매우 즐겼다. 그가 3명의 임원을 대동하고 골프장에 갔을 때다. 유달리 페어웨이가 좁은 한 홀에서 그와 나머지 3명이 친 공이 모두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거침없는 성격대로 성큼성큼 숲 속으로 걸어갔다. 그는 다른 임원의 공을 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동반자 3명은 난처해졌다. 그 상황에서 “대표님. 그 공은 대표님 공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공을 뺏긴 한 임원은 얼른 다른 공을 꺼내 떨어뜨린 후 “대표님. 저는 제 공 찾았습니다”라는 거짓말까지 했다.
더 놀라운 반전이 있다. 해당 CEO는 훗날 필자에게 “일부러 동반자의 공을 내 주머니에 넣었다”고 털어놨다. 임원들이 자신이 엉뚱한 행동을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나 싶어 일부러 떠봤다는 거였다.
그에게 자신의 공을 뺏기고도 거짓말을 한 임원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나다”고 후하게 평가했다. 이 일화에 대해 혹자는 “그냥 본인 앞에서 설설 기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냉소했다. 하지만 CEO의 성향을 잘 맞추는 것도 분명 임원의 능력이다.
다른 일화도 있다. A 임원의 실적이 저조해 연말 인사에서 해고 후보에 올랐다. 그의 거취를 고민하던 해당 회사의 대표이사는 1년 더 기회를 줬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A가 골프 싱글이라지? 아마추어 골퍼가 싱글을 칠 정도면 보통 독한 게 아니잖아. 그런 성격이면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기사회생한 A는 그 다음해 거짓말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뤄냈고 해당 기업에서 승승장구했다. 물론 실화다.
이처럼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한국 중장년층 남성에게 골프는 꽤 중요하다. 4시간 넘는 라운딩으로 CEO나 거래처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도 있고, 동시에 그들에게 단단히 찍힐 수도 있다. 또 때로는 해고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동아줄이 된다. 이렇듯 중요한 골프를 치지 않고 버틴 필자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잣대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골프는 대단한 운동이다.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 필자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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