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야구공을 꼭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한테 야구가 뭐냐고요? ‘최·동·원’ 이름 석자지.”
최동원. 이렇게 많은 부산 사람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세 글자가 또 있을까.
한 프로야구 롯데 팬은 말했다. “박정태가 롯데의 정신이라면 최동원은 롯데의 혼(魂)이라고.”
그가 공을 던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철완(鐵腕)이라는 낱말이 진짜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만 롯데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던 게 아니다. 그는 실업리그 시절이던 1981년 ‘코리언시리즈’에서도 6경기에 모두 등판해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져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롯데에 실업리그 마지막 챔피언 자리를 선물했다.
재미있는 건 4차전. 최동원은 이 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와 7회까지 던졌다. 8회초 수비를 시작할 때는 1루수로 포지션을 바꿨지만 2사 만루 위기가 찾아오자 다시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매조지었다. 그래서 이 경기 기록이 1승 1세이브다. (현재 야구 규칙은 승리 투수가 된 선수에게 세이브를 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시즌 메이저리그 입단 취소 파동을 겪기도 했던 최동원은 아마추어 선수만 참가할 수 있던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참가 문제로 1982년은 한국전력에서 보냈다. 다시 롯데로 돌아온 1983년 최동원은 208과 3분의 2이닝을 평균자책점 2.89로 막아냈다. 하지만 당시 롯데 타선은 팀 타율 0.244로 6개 팀 중 꼴찌였다. 최동원은 결국 9승 16패 4세이브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1984 시즌이 개막했다. 최동원은 이해 정규리그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져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당시는 전·후기 리그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방식이었다. 전기 리그 1위 팀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영덕 감독은 ‘져주기 게임’ 끝에 OB(현 두산)보다 만만해 보이는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롯데의, 아니 최동원의 우승이었다.
롯데는 김 감독 판단처럼 약한 팀이었을지 몰라도 최동원은 아니었다. 1차전에서 완봉승을 최동원은 3차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완투승을 따냈다. 5차전은 완투패. 6차전은 구원승. 7차전은 다시 완투승이었다.
그는 은퇴한 뒤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뒤따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다만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이 배신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거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이 1, 3, 5, 7차전 등판 예정 소식을 전하면서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라고 말하자 시원하게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답했다. 하지만 4년 뒤 트레이드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였다.
최동원은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롯데에서 최동원을 내보내기로 결정한 건 선수회 파동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프로야구 팀들이 선수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신분을 보장하지 않은 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선수회를 결성해 힘을 모으려고 했다. 그러자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이 저지에 나서면서 최동원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최동원은 선수회 결성을 시도하면서 ‘법무법인 부산’을 찾아 자문했다. 당시 최동원과 상담한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된 최동원은 우리가 알던 그 최동원이 아니었다. 롯데에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 후반기에 복귀했지만 30이닝을 8경기에 나와 1승 2패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이듬해 평균자책점 5.28을 기록한 뒤 결국 프로야구 무대를 떠났다.
최동원은 은퇴 이듬해였던 1991년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낙선한 뒤 방송인으로 변신한다. 야구 해설위원으로 야구계에 돌아온 그는 한화에서 투수 코치로 류현진(30·LA 다저스)을 발굴하는 한편 퓨처스리그(2군)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가 프로야구 현장으로 돌아온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롯데 팬들은 그가 다시 롯데 유니폼을 입을 수 있기를 꿈꿨지만 2009년 7월 4일 시구 때를 제외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09년 문을 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에 있는 최동원 자리도 처음에는 텅 빈 상태였다.
최동원은 끝내 롯데와 화해하지 못한 채 2011년 9월 14일 지병이던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이 하늘나라로 갈 때 입은 옷은 롯데 시절 입었던 하얀 유니폼이었다.
반면 롯데 관계자들은 별세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빈소를 찾아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11번)을 영구결번했고, 안방 사직구장 앞에 최동원 동상이 들어설 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화해를 모색했다. 이제는 아들 최기호 씨가 한때 롯데 구단 프런트로 일할 만큼 관계를 회복한 상태다.
“짧고 굵게 야구한 게 내하고 잘 맞는다“던 그는 세상도 그렇게 살고 돌아갔다. 요즘 잘 나가는 후배들을 보면서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롯데, 야 임마야, 이만하믄 됐다 그라지 말고 가을 끝까지 단디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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