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오랫동안 불편한 몸으로 딸을 위해 헌신했다. 이번에는 그 딸이 잊고 있던 아버지의 꿈을 되찾도록 응원했다. 이번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최고 전성기를 맞은 이정은(21·한국체대)과 아버지 이정호 씨(53) 이야기다.
이정은은 이번 시즌 KLPGA투어에서 3승을 올리며 상금 1위(8억5500만 원)를 달리고 있다. 또 대상 포인트와 평균 타수(69.74타) 등 주요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새로운 필드 여왕을 꿈꾸는 이정은은 평소 “아버지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 무슨 사연일까. 아버지 이정호 씨는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다 30m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이정은이 네 살 때 일이었다. 전남 순천에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가던 이 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골프를 접한 딸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최고의 선수로 키웠다. 어머니 주은진 씨(47)는 “레슨 프로로 일하던 지인의 배려로 태권도 교습료보다 3만 원 더 내고 골프를 배웠다”고 설명했다. 이정은이 고교 시절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훈련 경비를 줄이기 전까지 전세금 대출까지 받으면서도 운동하는 딸을 뒷바라지했다.
아버지는 몇 년째 대회 때마다 손으로만 조작이 가능한 장애인 전용 승합차를 몰며 딸의 운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정작 대회장에서는 딸에게 부담을 줄까 봐 주차장에서 기다린 적도 많았다. 이런 정성 덕분에 이정은은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사상 첫 골프 2관왕에 오른 뒤 지난해 KLPGA투어 데뷔 후 신인상을 받았다. 이정은은 상금으로 경기 용인의 전셋집을 선물했고 아버지에게는 전동 휠체어를 사 드렸다.
딸의 그림자 역할을 하던 이 씨가 이번에는 값진 메달을 자신의 목에 걸었다. 이 씨는 19일 충북 제천에서 끝난 전국장애인체육대회 탁구 남자 단체전에서 전남 대표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지난해 이정은이 프로에 데뷔한 뒤로 더 적극적으로 딸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탁구채를 놓았던 그는 최근 딸의 권유로 다시 라켓을 들었다. 이정은이 “이젠 아빠가 좋아하는 걸 해보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씨는 교통사고 후 3년 가까이 힘든 나날을 보내다 집 근처 사회복지관에서 우연히 접한 탁구에 빠져들었다. 사고 이전에 조기축구회에서 활약하던 그는 곧 수준급의 탁구 실력을 갖췄다. 이 씨는 “탁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기력한 생활 속에서 아내와 이혼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던 내가 탁구를 통해 신체적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운동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2012년과 2013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복식에서 2년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이 씨는 “탁구 대회를 준비하느라 요즘 정은이에게 소홀해 미안했다. 다시 정은이 곁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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