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는 1982년 정부 주도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를 총괄하는 기구다. 총재의 권한도 막강하다. 초창기부터 정치권 인사들이 ‘낙하산’을 타고 잇달아 KBO 수장으로 취임한 배경이다. 초대 서종철 총재부터 현(19~21대) 구본능 총재까지 모두 12명이 KBO를 이끌었는데, 무려 9명이 정·관계 또는 군장성 출신이었다. 12~14대 박용오 총재, 17~18대 유영구 총재, 구본능 총재만이 정치권과 무관했다. 또 3년 임기를 채운 총재도 4명에 불과하다. 서종철 총재를 비롯해 3~4대 이웅희, 박용오, 구본능 총재뿐이다.
● KBO의 기틀 다진 서종철 총재
서종철 총재는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지낸 군 출신이지만 KBO와 한국프로야구의 초석을 튼튼하게 닦은 덕분에 지금까지 야구계의 큰 존경을 사고 있다. 3만석 규모의 사직구장 신축에 앞장섰고, 걸음마 단계의 한국프로야구가 미·일프로야구와 교류를 트는 데 기여했다.
1988년 3월 서종철 총재 퇴임 이후 1998년 12월 박용오 총재가 취임하기까지 10년간은 KBO가 정·관계 및 군부 유력 인사들의 쉼터 같은 곳이 됐다. 특히 6대 오명 총재는 1993년 11월 26일부터 12월 21일까지 고작 26일간 재임해 역대 최단기 총재로 남아있다.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하느라 KBO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뒤를 이은 7대 권영해 총재도 1994년 3월 21일부터 12월 23일까지 278일만 재임한 뒤 안기부장으로 옮겨갔다.
● 첫 ‘민선’ 커미셔너 박용오 총재
정치권 낙하산 인사들의 폐해가 커지자, 야구계 내부에서 총재를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1998년 12월부터 만 7년간 역대 최장기간 재임한 박용오 총재는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했다. 최초의 ‘민선’ 커미셔너였던 박용오 총재는 당시 두산그룹 회장이었다. KBO가 출범한지 17년 만에 구단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총재가 등장한 것이다.
박용오 총재는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취임한 무렵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용 사태의 불똥은 프로야구에도 튀어 쌍방울과 해태의 매각 문제가 최대 난제였는데, 각각 SK와 KIA를 끌어들여 위기를 수습했다. 프리에이전트(FA) 제도, 시즌 타이틀스폰서 도입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치적이다. 또 박용오 총재의 재임기에 지금의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도 태동했다. 당시 KBO와 박용오 총재는 선수협 설립에 제동을 걸었으나, 정부의 개입으로 한 발 물러섰다.
● 9·10구단 낳은 유영구&구본능 총재
15~16대 신상우 총재 하에서 KBO는 다시금 정치권의 외압에 휘말리며 일시적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2009년 2월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이 KBO 총재로 취임하면서 민선체제를 회복했다. 유영구 총재는 비록 개인비리로 불명예 중도 퇴진했으나, 제9구단 NC의 창단을 주도하며 10구단 체제의 밑그림을 완성한 큰 공을 세웠다. 유영구 총재는 또 ‘무보수 봉사’를 선언해 후임자인 구본능 총재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