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치지 않는 자의 골프 이야기]<14화>골프와 내기…돈 잃어도 재미있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4일 11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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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청(海靑) 김형목(金炯穆) 전 영동고 이사장(1928~2003). 그를 아는 분이라면 강남에 오래 살았거나 강남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출생한 그는 월남 후 제지 및 해운사업으로 큰 부를 일궜다.

그는 그 돈으로 ‘영동(永東)’이라 불렸던 현재의 강남땅을 샀다. 그가 보유한 강남땅이 10만 평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말 그대로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강남을 지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강남은 논밭만 가득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왜 그가 쓸모없는 땅을 사들이는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닌 ‘영동’은 강남 일대가 서울시에 최초 편입될 당시 영등포가 중심지였기에 그 곳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가 강남 부동산을 매입했을 때만 해도 강남개발 계획이 수립되지도 않았을 시점이다. 많은 사람이 상인 김형목의 ‘촉’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게다가 김 이사장은 땅을 산 뒤에도 독특한 행보를 이어갔다. 자신이 보유한 강남 땅 중에서도 가장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뚝 떼서 정부에 헌납한 것. 그 땅에 세워진 건물이 바로 현재의 강남구청이다. 관공서가 들어선 터라 자연스레 강남구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고 주변을 에워싼 그의 땅은 다른 강남 부동산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

‘버려서 얻는다’ ‘일보후퇴 이보전진’이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한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의 ‘거상(巨商)’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아무튼 김 이사장은 자신의 강남땅에 영동고를 세우고 강남 최초 백화점인 영동백화점도 지었다. 1983년 건립된 영동백화점은 단순한 쇼핑 장소를 넘어선 강남의 랜드마크이자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사교장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필자 역시 이 백화점 앞을 가끔 지날 때마다 그 화려함에 기가 죽었다.

○골프와 자식

세상에 ‘유이’하게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과 골프라고 한다. 김 이사장도 아들 중 한 명 때문에 꽤나 속을 썩였다. 1990년 2월 1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히로뽕사장 관련 19개 기업 특별 세무조사’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국세청은 9일 마약을 상습 복용하는 등 반사회적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김* 서울 영동백화점 대표, 이** 일자표 연료공업 대표, 박** 태광실업 대표 등 기업인 4명과 이들이 경영하는 19개 관련기업에 대해 특별세무조사에 착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1990년 2월 10일 동아일보 1면
1990년 2월 10일 동아일보 1면


기사 첫 머리에 나오는 김 모씨가 바로 김 이사장의 아들이다. 게다가 그는 ‘내기 골프’나 ‘내기 바둑’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그의 내기에선 억 단위 돈이 우습게 오가는 통에 소위 ‘꾼’들이 그를 만나 한몫 챙긴 뒤 팔자를 고쳤다는 소문도 있다.

바둑평론가 이광구 씨의 책 ‘바둑 이야기’에 보면 내기 바둑꾼들이 하는 수법이 잘 드러나 있다.

1. 처음 상대방, 소위 ‘호구’와 우연을 가장해 만난다.

2. 내기 없이 바둑을 둔다. 살짝 이겨 상대방의 승부욕을 자극한 후 연달아 일부러 져준다.

3. 내기 바둑에 돌입한다. 판돈을 살짝 건 후 승패를 반복하다 이기기 시작한다.

4. 애가 단 상대방으로 하여금 판돈을 대거 올리도록 유도한다.

5. 큰 판돈이 걸린 상황에서도 이기고 지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다 상대방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정도의 큰 한 판을 제안하도록 만든다.



‘꾼’들은 내기 골프에서도 비슷한 수법을 사용한고 한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꾼을 한 번만 만나도 패가망신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 모씨는 워낙 부자 아버지를 둔 덕에 여러 번 털리고도(?) 살아남았다나.

하지만 위에 언급한 형사 사건을 비롯해 각종 스캔들에 연루되고 다른 백화점들과의 경쟁에 밀려 영동백화점은 1993년 1월 폐업했다. 나산그룹이 이를 인수해 나산백화점으로 재 개점했지만 IMF 사태로 나산 또한 부도를 맞았다. 영동백화점 역사가 마감된 것이다.

○골프와 내기

김 모 씨 정도의 거액은 아니지만 필자의 지인들도 내기 골프를 꽤 즐기는 것 같다. 이들은 입을 모아 “돈의 액수에 상관없이 내기를 하지 않으면 골프가 재미없다”고 한다. 골프를 치지 않는 필자는 그 심정을 알 수 없다. 다만 잘 치거나 못 치거나 다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내기를 해야 한국인 특유의 경쟁심이 발동해 골프 실력까지 향상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골프 애호가였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매주 2번 안양 베네스트에서 골프를 즐겼다. 그 역시 타당 1000원 내기를 즐겼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고 거부가 1000원이라니 그 소박한(?) 액수에 놀라기도 했다. 그 역시 “대충대충 골프를 치지 않으려면, 즉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플레이의 묘미를 돋우려면 내기가 필요하다”고 했단다.

최근 미국 뉴욕 출장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현지에 사는 한 고교 친구를 만났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한국에 있을 때보다 골프를 훨씬 자주 치는데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하던 친구의 표정이 아주 밝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답이 재미있다. “나 요즘 내기 골프를 즐겨. 돈을 따느냐고? 아니 매일 잃어. 그런데도 재미있어.” 친구의 설명은 이렇다. 자신이 항상 돈을 잃으니까 같이 골프를 치자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단다. 이런 사람들은 골프를 칠 때도 자신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그러다 보니 실력에 상관없이 골프까지 예전보다 더 재미있어졌다는 거다. 나이 오십을 넘으니 친구가 ‘도’를 터득한 것 같아 새삼 그가 달리 보였다.

객관적 수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만큼 내기 골프가 성행하는 나라는 없는 듯하다. 내기 골프로 선대가 일군 재산을 탕진하기보다는 집중도를 높이고 묘미를 느끼기 위한 일종의 MSG 정도로 내기를 즐기는 게 어떨까. 설사 돈을 잃어도 필자의 친구처럼 ‘돈 몇 푼 잃는 대신 사람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필자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역서 ‘할리데이비슨, 브랜드 로드 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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