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선수들 특유의 어투·억양으로 위협 김진수, 참다참다 “너 몇 살이냐” 되받아 두 살 아래 박명성에 “형이다” 상황 종료 여자 선수들은 아예 인사 한 마디 안 나눠
스포츠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스포츠와 정치는 절대 결부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무색할 만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스포츠와 정치다. 하물며 총칼을 겨눴던 사이였다면 그 심각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같은 민족끼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한반도다.
2017년 겨울, 남북은 축구라는 매개체 덕분에 다시 만났다. 일본에서 개막한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을 통해서다. E-1 챔피언십이 열리기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북한이 최근 들어 잇달아 핵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며 동아시아 정세를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스탠드의 관중들은 들을 수 없지만 그라운드에서 경쟁하는 남과 북의 선수들은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말을 주고받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의 경기와는 달리 훨씬 고차원적인 심리전이 말을 통해 벌어진다.
2014인천아시안게임 축구 남자 결승전. 당시 우승이 걸린 남북전에서 북한 선수들은 입에도 담기 힘든 욕설을 내뱉으며 한국 선수들을 압박했다. 말만 들으면 목이 수차례는 달아났을 법한 정도였다. 거친 플레이는 덤이었다.
특히 북한 선수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투적이고 평소 우리가 듣기 힘든 말들이기에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느끼는 위협감은 다른 경기보다 크다. E-1 챔피언십에 출전중인 김신욱(29·전북 현대)이 경험한 그라운드 위의 남북전 신경전 뒷얘기는 흥미롭다.
경기 도중 프리킥을 앞두고 양팀의 선수가 몸싸움을 한창 하던 때였다. 북한의 어느 선수가 김신욱을 보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 키 큰X 얼굴을 발로 밟아버리라우.” 그 말을 들은 김신욱이 대꾸했다. “동무 너무 그러지 맙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내가 머리를 짓밟아버리갔어” “담궈버리갔어”라고 그들은 말로 위협을 했다.
순간 김신욱은 그들의 어투와 강한 억양에 긴장도 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경기에 집중했다. 김신욱을 안심시킨 생각은 이랬다. “내 키가 197cm인데 쟤들이 아무리 발로 내 얼굴을 차려고 해도 발이 닿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그들의 말이 우습게만 여겨졌다고 했다.
4월 평양에서 벌어졌던 여자축구 남북전도 치열했다. 2018요르단아시안컵 예선으로 치른 경기에서 남북은 1-1로 비겼다. 이 경기 때도 서로 “죽이자”는 말이 오고갈 정도로 살벌했다. 당시 경기에 출전했던 지소연의 기억을 정리하면 이렇다. 북한 선수들로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라운드에 입장할 때부터 전투적으로 나왔다.
우리 선수들을 보자마자 ‘죽여버리갔어’라고 입을 모았다. 지소연 등 우리 선수들은 ‘왜 이래. 그러지맙시다’라고 대꾸했지만 북한 선수들은 세리머니 때도 계속 ‘죽인다’를 반복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 선수들도 달아올랐고 결국 ‘다 죽여 저X들’이 우리 선수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기 싸움에서 지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북한을 제치고 아시안컵 출전권을 따냈다.
물론 남북전이 매번 피 튀기는 언어의 전쟁으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2015동아시안컵(E-1 챔피언십 전신) 여자 남북전. 최종전으로 열린 이날 경기는 그간 쉽게 볼 수 없던 장면도 만들었다. 남북 자매들이 경기종료 후 셀카를 찍으며 우애를 나눈 것이다. 이번에는 동아시아의 정세가 워낙 냉랭한 탓에 3년 전 아시안게임처럼 살벌한 단어가 그라운드에서 오고갈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조용하게 마무리됐다.
재미난 에피소드는 12일 남자 남북전에서 나왔다. 김진수(25·전북 현대)의 입을 통해서 알려진 얘기다. 이날 김진수는 북한 수비수 박명성(23)과 경기 도중 부딪혔다. 그러자 박명성이 “조금 착하게 (플레이)하라우”라며 시비를 걸었다. 이에 김진수는 “너 몇 살이냐”고 되받아쳤다.
곧바로 박명성이 나이를 밝혔는데 알고 보니 김진수가 두 살 위 형(김진수는 1992년생, 박명성은 1994년생)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진수는 “내가 형이다”는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종료해버렸다.
그러나 하루 앞서 열린 11일 여자 남북전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4월 평양에서 치른 남북전의 후폭풍 때문이었다. 북한은 그 경기 이후 8개월간 칼을 갈고 닦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라운드 밖에서 느낄 수 있었다. 대표팀 관계자는 “그래도 선수들이 서로 인사는 주고받았는데 이날만큼은 북한 선수들이 인사도 나누지 않더라. 아마 4월 경기 이후 조금은 변화가 있어 보인다”고 귀띔했다.
북한 김광민(55) 감독에게서도 같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날 북한은 1-0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영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이었다. 김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4월 평양”이라는 단어를 지겹도록 꺼내들었다. 당시를 “가슴 아픈 추억”, “뼈저린 체험”으로 표현하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은 “집단력과 결속력을 통해 승리를 거뒀다. 아직 4월의 한이 풀리지 않았다”며 복수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이제 2017년의 남북전은 끝이 났지만 내년, 내후년 또 다른 남북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은 또 어떤 말을 주고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