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D-50/별들에게 꿈을 묻다]<1> ‘스키 여제’ 린지 본 단독 인터뷰
‘평창의 활강’ 8년의 기다림… 마지막 대관식 부푼 꿈
《올림픽은 전 세계 별들의 무대다. 이 무대를 가장 화려하게 빛낼 별들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평창 올림픽을 기다리는 톱스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한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전 세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스키 여제’ 린지 본(33·미국). 그에게 ‘비운’의 그림자를 가장 크게 드리웠던 곳은 프랑스 발디제르였다. 소치 올림픽을 1년 앞둔 2013년 세계선수권에서 오른 무릎 인대가 끊어졌던 본은 집념의 재활 끝에 그해 11월, 올림픽을 약 석 달 앞두고 월드컵 무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복귀 한 달 만인 12월에 출전한 발디제르 월드컵에서 본의 무릎은 다시 부러지고 말았다.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며 본의 올림픽 2연패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안겼던 바로 그 문제의 ‘발디제르’에 다시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 나타난 본을 15일 만났다. 4년 전 올림픽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그에게 너무도 가혹한 결과를 안겼던 곳을 자신의 생애 ‘마지막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찾은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본은 자신의 스키인생과 더불어 6·25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울먹이며 전했다.
○ 발디제르, 애증의 장소? “Nope!”
“스키를 탈 때면 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경기장이 어디이든 그렇다. 심지어 레이크루이즈(본이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캐나다의 경기장)에서 첫 활강 월드컵에 나갔을 때도 크게 넘어져서 헬리콥터에 실려 갔었다(웃음). 모든 경기에는 늘 새로운 기분으로 임하려고 한다.”
1999년, 15세 때 국제무대에 등장한 본은 20년 가까이 스키를 타면서 그중 절반이 넘는 세월 동안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이미 2015년 1월 63번째 월드컵 우승으로 여자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다시 썼다. 2016∼2017시즌 전 어깨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또다시 올림픽에 나서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들어야 했지만 2017년 1월 통산 77회 월드컵 우승을 일궈냈다.
본은 16일 발디제르에서 열린 2017∼2018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 슈퍼G 시즌 우승으로 월드컵 통산 우승을 78회로 늘렸다. 성별을 뛰어넘어 잉에마르 스텐마르크(스웨덴)가 가지고 있는 역대 최다 월드컵 우승(86회) 기록 경신 도전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 안티 트럼프 논란? “내 일에만 집중할 것이다”
올 시즌 초반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시즌 첫 대회에서는 넘어졌고, 두 번째 대회에서는 허리를 삐끗하며 부진했다. 설상가상으로 ‘평창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백악관이 초청한다면 응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단호히 “아니요!”라고 답한 CNN 인터뷰 영상이 공개된 뒤에는 누리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목이나 부러져라’ ‘반(反)트럼프 발언으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악플이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본은, 늘 그렇듯, 의연하다. 본은 “나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국기를 내걸고 걷는 의미를 잘 안다. 우리나라를 잘 대표하고 싶다. 현 정부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최근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국대사 등의 발언으로 불거졌던 ‘미국의 올림픽 불참 논란’에 대해서도 말했다. 본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선수 중 누구도 안전 문제를 두고 이번 올림픽 참가를 걱정한 이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평창 올림픽 불참을 추호도 고려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 할아버지에게 바치고픈 평창 메달
본은 올 11월 첫날 할아버지를 잃었다. 본의 아버지, 그리고 본에게 스키를 가르친 사람이 바로 그다. 할아버지는 평창이 2018 겨울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을 때 무척 신났다고 했다. 그리고 올 7월, 본이 생전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 할아버지는 잘 꺼내지 않았던 6·25전쟁의 기억들을 본에게 찬찬히 들려줬다.
“전부터 집에 사진은 많았는데 할아버지가 전쟁에 대해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올림픽 경기를 치를 정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2년 조금 넘게 머물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함께 살다시피 돌봤던 한국 아이들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당시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청바지고 신발이고 한국 아이들을 입히겠다며 온갖 것을 할아버지에게 보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한국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게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 얘기를 해주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평창 올림픽 기간 정선에서는 알파인 스키 경기가 열린다. 본의 할아버지는 공병으로 6·25에 참전했다.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평창에 모셔서 손녀의 레이스를 보여드리려고 애썼기에 올림픽을 100일 앞두고 할아버지가 숨을 거둔 사실은 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본은 씩씩하게 이겨냈다. “그래도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리면서 할아버지가 그런 추억들을 우리 가족에게 들려주실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다.”
○ 마지막 올림픽 대관식을 향한 발걸음
그녀에게 평창은 8년의 기다림과 스키 인생 마지막을 장식할 무대다. 어느 때보다 독기를 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은 발디제르 슈퍼G에서 첫 구간을 13위에 그치고도 최고 속도를 시속 100.25km까지 끌어올리는 놀라운 막판 스퍼트로 기어이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세간의 의심을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켜보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본은 “아버지한테 올 시즌 몇 경기에 와주실 수 있냐고 물었고, 여기에 오셨다. 아버지는 늘 ‘절대 포기하지 마라’고 하신다. 내 커리어가 끝에 다다르고 있어서 모든 것이 좀 더 특별한 것 같다. 특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더욱 그렇다. 오늘도 할아버지를 위해서 더 열심히 뛰었다. 레이스 하면서 할아버지와 더 가까이 있다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본은 울먹였다. 하지만 애틋한 눈물이 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올림픽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다. 특히나 이번 올림픽을 기다렸다. 한국에 다시 갈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렌다. 사람들도, 레이싱도 기대된다. 또 마지막 올림픽이니 더더욱 특별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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