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에게 꿈을 묻다]눈밭의 강심장 “올림픽도 월드컵처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7일 03시 00분


<5> 22세 스키 여왕 미케일라 시프린

‘피겨 퀸’ 김연아는 전성기 시절 외계에서 온 게 아니냐는 찬사를 들을 만큼 ‘급이 다른’ 연기를 펼쳤다. 빙판에 김연아가 있다면 눈밭에는 미케일라 시프린(22·미국)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올 시즌 자신의 주 종목인 회전이 아닌 활강에서도 생애 첫 월드컵 우승을 거둔 시프린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 회전 종목에서 적어도 금메달 1개를 노리며 최대 여자 알파인 스키 5개 전 종목 메달까지 넘본다.

19, 20일 프랑스 쿠르슈벨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전, 평행회전에서 연속 우승을 거둔 뒤 만난 시프린은 평창 5관왕 도전에 대해 “활강 출전은 아직 미확정이다. 물론 컨디션이 좋다면 나설 것이다. 아마 올림픽 직전에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소 기대치가 ‘올림픽 금메달’인 시선이 부담되지는 않느냐고 묻자 시프린은 “그런 기대를 해준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맙다. 부담은 없다. 올림픽이란 멋진 무대에서 스키에 대한 열정을 세계와 공유하고 싶다. 멋진 기회다”라고 답했다. 평창에서 만날 한국 팬들에게 남겨달라는 메시지에 시프린은 ‘크게 응원해 주세요! 쇼를 즐기시길 바랍니다(Cheer loud! We hope you enjoy the show)!’라고 썼다.

19일 프랑스 쿠르슈벨 월드컵 회전 우승 후 만난 미케일라 시프린이 평창에서 만날 한국 팬들을 향해 남긴 메시지. ‘크게 응원해 주세요! 쇼를 즐기시길 바랍니다(Cheer loud! We hope you enjoy the show)!’ 쿠르슈벨=임보미 기자 bom@donga.com
19일 프랑스 쿠르슈벨 월드컵 회전 우승 후 만난 미케일라 시프린이 평창에서 만날 한국 팬들을 향해 남긴 메시지. ‘크게 응원해 주세요! 쇼를 즐기시길 바랍니다(Cheer loud! We hope you enjoy the show)!’ 쿠르슈벨=임보미 기자 bom@donga.com
시프린이 처음부터 이런 강심장을 갖춘 건 아니었다. 시프린은 지난해 국제스키연맹(FIS)이 처음으로 개최한 미국 버몬트주 킬링턴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했다. 당시 시프린을 보기 위해 스키 팬 3만 명이 몰렸다. 시프린의 95세 할머니를 포함한 일가친척, 고교 동창도 모두 경기장을 찾았다. 하지만 지나친 압박은 독이 돼 시프린은 첫날 대회전 5위에 그쳤고 다음 날 회전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2위와 0.27초 차로 시프린 기준으로는 상당한 박빙 끝에 따냈다.

이후에도 시프린이 경기 때 갑자기 찾아온 긴장으로 잔실수를 범하자 어머니 아일린 시프린은 딸에게 심리상담을 권했다. 스카이프로 전문가에게 몇 차례 상담을 받은 뒤 시프린은 ‘강철 멘털’로 거듭났다. 알파인스키 월드컵 종합랭킹 1위 시프린은 “월드컵 투어를 하다 보면 컨디션이 별로인 날에도 좋은 멘털을 유지해야 하는데 요즘 그게 잘된다. 올림픽도 또 하나의 월드컵이라는 생각이다. 이 좋은 모멘텀을 끝까지 잘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여름부터 ‘롱디 커플(장거리 연애)’이 된 마티외 페브르(프랑스 알파인스키 선수)도 이탈리아에서 경기를 마치자마자 쿠르슈벨 경기장에 깜짝 응원을 와 시프린에게 힘을 보태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대회만 나가면 시프린은 또래보다 수초 앞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0.01초를 다투는 알파인스키에서 1초는 억겁과도 같다. 17세에 월드컵 회전에서 첫 우승을 거둔 시프린은 이후 우승을 밥 먹듯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키선수로 평가받는 린지 본이 처음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둔 나이가 20세였다는 사실은 시프린이 얼마나 ‘무서운 10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열아홉에 2014 소치 올림픽 회전 금메달을 딴 시프린은 2015년 애스펀 월드컵 회전에서는 2위와 역대 최대 기록 차(3.07초)로 우승하며 알파인스키의 새 역사를 썼다. 시프린에게 ‘천재 스키어’라는 칭호는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시프린의 부모는 딸이 “천재과는 전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프린 가족은 ‘1만 시간의 법칙’ 신봉자다. 시프린의 아버지 제프 시프린은 “모든 턴을 제대로 해라. 하나라도 농땡이 피워선 안 된다. 그건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렇게 설렁설렁 탄다면 아마 너는 그 낭비한 시간 때문에 은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시프린은 훈련 시간이 부족한 월드컵 경기 도중에는 피니시 라인에서 리프트를 타러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턴을 연습하면서 내려간다. 남들은 편하게 서서 내려갈 때 몇 초라도 더 훈련을 늘리겠다는 생각에서다. 시프린은 “예전에 훈련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해봤는데 깜짝 놀랐다. 대회 때 눈 위에서 훈련하는 시간이 하루에 7분 정도밖에 안 되더라. 그렇게라도 연습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

스키 마니아인 그의 부모는 시프린이 세 살 때부터 집 거실에서 끌고 다니며 스키를 가르쳤다. 시프린의 어머니 아일린은 고교 시절까지 수준급 선수로 활약했지만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면서 ‘경단녀’가 됐다. 학교에서 스포츠를 허락해주지 않았고, 취미로 시작한 스키여서 전문적인 스키 교육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한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엄마는 딸에게는 일찌감치 체계적으로 스키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 열성 덕에 시프린은 유치원 때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속 어머니에게 스키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스키 명문 기숙학교인 버크마운틴 스키아카데미에 진학했지만 이때도 엄마 아일린은 학교 주변에 콘도를 얻어 매일 밤 시프린의 기숙사에서 월드컵 영상을 함께 돌려봤다. 아일린은 지금도 코치 자격으로 시프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잔실수도 잡아내는 눈썰미로 아일린은 매 경기 피니시 라인에서 경기를 마친 시프린에게 바로 피드백을 준다.

두 번째 올림픽을 앞두고도 아직 22세에 불과하지만 시프린은 이미 월드컵 우승만 35차례 거뒀다. 큰 부상만 없다면 시프린은 본이 경신 중인 ‘여자 최다 월드컵 우승’ 기록(78회)도 넘볼 수 있다. 시프린에게 본의 기록 도전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본이 그렇게 많은 부상을 당하고도 다시 경기장에 돌아오는 게 정말 존경스럽다. 더군다나 본은 부상에서 복귀하고도 여전히 정말 공격적으로 주행한다. 아마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스키선수가 아닐까? 고작 30승을 조금 넘긴 나에게 최다 우승은 너무 먼 일이다. 물론 꿈을 꾸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자체를 맹목적인 목표로 삼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자신감만 있으면 설령 그게 활강 종목이라도 우승을 하게 되지 않나. 매 경기 내 목표는 ‘꼭 우승’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데에 있다. 나는 우승보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때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
 
▼ 미케일라 시프린은… ▼

△생년월일: 1995년 3월 13일생(미국 콜로라도주 베일)
△키, 몸무게: 170cm, 64kg
△올림픽 성적: 2014년 소치 올림픽 회전 금메달
△월드컵 성적: 개인 통산 우승 35회, 2016∼2017시즌 알파인스키 여자 종합 랭킹 1위(알파인 스키 5개 전 종목 선수 통틀어 최고 FIS 포인트)
△주요 기록: 2011년 US선수권 최연소(16세) 챔피언, 역대 알파인스키 회전 최대 기록 차 우승(2015년 애스펀 월드컵, 2위와 3.07초 차로 우승. 이 대회 2위 선수와 20위 선수의 기록 차는 3.18초)
△올 시즌 알파인스키 종합 랭킹 1위: 월드컵 전 종목 중 슈퍼대회전 제외한 4종목에서 우승 5회(회전 2회, 평행회전 1회, 대회전 1회, 활강 1회)  
 
쿠르슈벨=임보미 기자 bom@donga.com
#미케일라 시프린#스키#2018 평창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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