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 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왔다. 올림픽에서 위력을 떨칠 겨울 스포츠 강국을 탐방한다. 국내 스포츠에 던져줄 시사점을 짚어본다. 》
지난 연말 찾은 네덜란드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풍차와 튤립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쉴 새 없이 눈과 비가 엇갈렸다. 우박까지 이마를 때렸다. 오전 8시 반이 돼야 주위가 훤해지더니 오후 4시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잿빛 세상 속에서 1700만 명 네덜란드 국민에게는 스케이팅이 유일한 즐거움처럼 보였다. 공원, 쇼핑몰 등 어디에서나 아이스링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케이트를 신은 남녀노소의 표정은 우중충한 하늘과 달리 밝기만 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근처 빙판을 질주하던 한스 스텔링 씨(73)는 한국 기자라는 얘기에 “(네덜란드 출신 한국 빙상대표팀 코치) 보프 더용은 잘하고 있느냐”며 “네덜란드에선 아기가 걷기 시작하면 스케이트부터 챙긴다”며 웃었다.
네덜란드는 세계적인 빙상 강국이다. 2014 소치 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에 걸린 금메달 12개 중 8개를 휩쓸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따낸 메달 24개가 모두 스케이팅에서 나왔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도 네덜란드는 전체 출전국 중 최다인 남녀 각각 10명씩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선수를 파견한다.
위트레흐트에 있는 네덜란드빙상연맹(KNSB) 사무실에는 네덜란드의 화려한 빙상 역사를 보여주듯 올림픽, 세계선수권 우승을 휩쓴 빙판 전설 20여 명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KNSB 아리 코프스 기술위원장은 “평창에서 적어도 12개의 메달이 목표다. 스벤 크라머르, 이레인 뷔스트는 우승 후보이며 크옐트 나위스, 요리언 터르 모르스 등도 기대된다.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가 나오는) 여자 500m를 제외하고 전 종목 금메달을 노릴 만하다”고 말했다.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는 운하와 수로가 발달해 일찍부터 겨울이면 자연 빙판을 타는 스케이팅이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나무판에 금속 날을 장착한 스케이트가 처음 등장한 것도 14세기 네덜란드로 알려졌다. 하루에 11개 도시 운하를 도는 200km 크로스컨트리 대회는 참가자만도 2만 명이 넘었다. 이 대회에 출전 경험이 있는 니코 브란트예스 씨는 “네덜란드 국왕이 몰래 참가해 완주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최근 지구 온난화에 따라 네덜란드는 인공 아이스링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네덜란드에는 400m 트랙을 갖춘 17개의 빙상경기장이 있다. 인구 100만 명당 한 개인 셈. 동네마다 잔디구장에 물을 뿌려 조성한 빙상장이 수백 개에 이른다.
카를 뮈레아우 KNSB 홍보팀장은 “전국에 8000개 넘는 스케이팅 키즈 클럽이 있다. 여기서 유망주를 찾아 15개의 지역 트레이닝 센터에서 집중 훈련을 시킨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 스케이팅 등록 선수는 1만 명이 넘는다. 100km 마라톤을 비롯해 연간 1500회 넘는 각종 스케이팅 대회가 열린다.
지도자 육성도 역점 분야다. KNSB는 네덜란드올림픽위원회와 연계해 수준별로 3가지 레벨의 지도자를 관리하고 있다. KNSB 자격증이 있는 코치만도 1250명이다.
대표 선수 출신인 마르틴 코치는 “네덜란드 대표 되기가 올림픽 메달 따기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치열한 내부 경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KNSB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27∼30일 진행된 평창 대표 최종 선발전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스릴러 영화 같았다”고 전했다. 소치 올림픽 500m 금메달리스트 미헐 뮐더르는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 스피드스케이팅은 축구와 F1 다음으로 인기가 높다. 뮈레아우 팀장은 “평창 올림픽 때는 450만 명이 TV 앞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인들에게 이상화, 이승훈의 지명도는 한국에서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만큼이나 높았다.
선진화된 스케이팅 관련 장비 산업도 네덜란드 빙상의 고속질주를 이끌고 있다. 네덜란드는 10년 연구 끝에 기록 향상을 주도한 클랩 스케이트를 개발했다. KNSB는 한국 기업 휠라와 유니폼 계약을 했다. 코프스 위원장은 “휠라는 공기 저항 개선 등으로 예전 경기복보다 3% 빠른 기록을 낼 수 있는 제품을 제공했다. 최상의 스케이팅 슈트까지 갖춘 네덜란드는 평창에서 최고의 성적을 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며 네덜란드 빙상의 전설 야프 에던의 이름을 따 1961년에 개장한 아이스링크에서 디크 베틀럼 씨(65)를 만났다. 선수처럼 몸에 바짝 달라붙는 경기복을 입고 클럽 회원과 스케이트를 즐기던 그에게 “네덜란드는 왜 스케이팅이 강한가”라고 물었다.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네덜란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한마디에 동료들이 일제히 미소를 지었다. 네덜란드 스케이팅의 오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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