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 호주오픈 16강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를 꺾은 뒤 중계 카메라 렌즈에 적은 ‘보고 있나?’라는 문구. 캡틴이라는 단어는 위쪽에 적어 잘 보이지 않는다. JTBC3 화면 캡처
‘뭘 보라고 한 것일까.’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22·한국체대·사진)은 22일 호주오픈 남자단식 16강전에서 거함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를 격침시킨 뒤 중계 카메라 렌즈에 한글로 “캡틴 보고 있나?”라고 썼다.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는 중계가 끝나면 승리자가 카메라 렌즈에 사인하는 이벤트를 벌이곤 한다.
3시간 30분 가까운 체력전을 벌인 정현은 경기 후 뭉친 근육을 푸느라 마사지를 받았다. 선수들의 컨디션 유지를 위한 조치가 취해진 뒤 공식 인터뷰가 다시 진행된다. 경기 직후 소감을 말했던 정현은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 뒤 현지 시간 자정이 넘어 다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보고 있나’라고 사인한 이유에 대해 “전 삼성증권 팀 김일순 감독과 약속을 했었다. 당시 팀이 해체되고 나서 마음고생이 제일 심하셨는데, 언젠가 잘돼서 위로해드리고 싶었다. 애교로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에는 ‘캡틴’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그는 “캡틴 보고 있나”라고 썼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캡틴’은 김일순 전 감독이었던 것이다. 김 전 감독은 정현이 힘들 때마다 바로잡아준 정신적인 지주다. 중학교 시절 일찌감치 유망주로 꼽혀 미국 유학을 떠난 정현은 현지 적응에 애를 먹으며 고전하다 2012년 고교 입학 후 삼성증권의 지원 속에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 삼성증권 감독 시절 이형택을 길렀던 주원홍 전 대한테니스협회장이 정현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주선한 뒤 제자인 김 전 감독에게 지도를 맡겼다.
정현은 고교 시절 승승장구하며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금융 불황 여파 등에 따라 팀이 해체됐다. 이 여파로 김 전 감독, 윤용일 전 코치와 남지성, 장수정 등 남녀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정현만 홀로 남아 삼성증권의 후원을 계속 받게 됐다. 당시 정현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당시 동료에 따르면 정현은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잘해야 팀이 없어지지 않는가. 나중에 잘되면 뭔가 특별한 세리머니를 하자”고 말했다. 정현의 ‘보고 있나’ 사인은 당시 심경과 약속이 담긴 것이었다.
현재 개인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고 있는 김 전 감독을 비롯한 삼성증권 멤버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친목을 다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현 자신도 삼성증권의 후원 계약이 3월 말이면 끝난다. 그동안 정현은 삼성증권으로부터 전담 코치와 트레이너 인건비, 해외투어 경비, 숙소 유지비 등을 지원받았다. 삼성그룹이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린 후 스포츠 분야에 대한 후원도 예전 같지 않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스포츠 지원을 재검토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상 정현과의 재계약은 힘든 분위기로 알려졌다.
정현은 자신의 8강 진출 의미에 대해 “한국에서 야구, 농구, 축구의 인기가 높다. 다음 달 평창 겨울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에 빙상 종목에도 관심이 많아 보인다”면서 “오늘을 계기로 테니스는 다섯 번째가 될 것 같다. 예전보다 인기가 올라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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