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좀 허무하게 끝나서 죄송… 질릴 때까지 누워있고 싶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03시 00분


[테니스 메이저 첫 4강 정현 인터뷰]정현 귀국 “큰일 하고 온 느낌”

《 메이저 대회 ‘4강 신화’를 쓴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2·한국체대·사진)이 28일 수많은 팬들의 환영 속에 금의환향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아픈데도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오르는 투혼을 보인 정현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니 제가 큰일을 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라며 웃었다. 정현은 “4강에서 기권해 팬들과 로저 페더러(스위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
 

‘4강 진출’ 본보 들고… 한국 테니스의 새 역사를 쓴 정현이 27일 숙소인 호주 멜버른 
그랜드하이엇호텔에서 그의 4강 진출 소식을 다룬 25일자 동아일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언론의 조명과 팬들의 성원에 대해 정현은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멜버른=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4강 진출’ 본보 들고… 한국 테니스의 새 역사를 쓴 정현이 27일 숙소인 호주 멜버른 그랜드하이엇호텔에서 그의 4강 진출 소식을 다룬 25일자 동아일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언론의 조명과 팬들의 성원에 대해 정현은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멜버른=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자 입국장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정현(22·한국체대)은 조금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1시간 전부터 정현의 등장을 기다리던 300여 명의 인파는 “정현 파이팅”을 외치며 그를 반겼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준 걸 보니 제가 큰일 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웃음).”

호주오픈 4강에 진출하며 한국 테니스의 새 역사를 쓴 정현이 28일 금의환향했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정현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처 때문인지 다리를 약간 절뚝였다. 그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37·스위스)와의 4강전에서 발바닥에 난 물집이 악화돼 기권했다.

정현은 “발에 통증이 있어 다음 주부터 병원에 다니면서 몸 상태를 확인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보라는 질문에는 “일단 하나만 꼽으라면 못 꼽을 것 같다. 노바크 조코비치(31·세르비아)를 꺾고 한국 선수 최초로 8강에 진출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페더러와의 4강전도 그렇고, 모든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

환영 나온 어린이 팬들과 하이파이브 정현(왼쪽)이 28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환영하러 온 어린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인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환영 나온 어린이 팬들과 하이파이브 정현(왼쪽)이 28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환영하러 온 어린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인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그는 “이 대회를 진짜 잘하기 위해 세웠던, 우리 팀만 알고 있던 목표를 이제는 공개하겠다”며 “코트 안팎에서 인스타 10만 명 만드는 거였는데 그 목표를 이뤄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인스타그램에 썼었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호주오픈 기간 동안 10만 명을 돌파해 28일 현재 12만 명을 넘었다.

“하루에 300개 넘는 축하 메시지가 왔어요. 연락처를 아는 분들에게는 일일이 답변을 해드렸죠. 그렇다고 절대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은 하지 않아요. 휴대전화 중독이라 빨리 치거든요(웃음).”

인파 속에서 까치발을 한 채 지켜보던 직장인 최모 씨(36·여)는 “중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정현이 온다는 소식에 이곳에 서서 기다렸다”며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분이 아닌가. 제2의 박세리, 박찬호가 돼 계속 희망을 전해주는 선수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현의 모교 수원 삼일공고에서도 11명의 학생과 관계자들이 입국장을 찾아 축하했다. 정현의 사진과 함께 ‘테니스의 왕자’라고 적힌 피켓을 든 허덕구 씨(58)는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복식)을 땄던 때의 사진을 휴대전화 배경화면으로 해놓을 정도로 팬이다”며 “세계적인 무대에서 보여준 당당하고 재치 있는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공항을 떠나기 전 정현은 “몸 상태를 확인한 뒤 2월 초 불가리아에서 열리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대회 출전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 팬들과 페더러에 대한 미안함

입국 하루 전인 27일 호주 현지에서 만났던 정현은 팬들과 페더러에 대한 미안함을 먼저 표시했다.

“분하다기보다는 모든 분에게 죄송했어요. 특히 로저 페더러에게 미안했습니다. 조금 허무하게 끝났잖아요.”

정현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찢어진 발바닥 사진을 올린 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기를 포기하기 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팬분 앞에서, 훌륭한 선수 앞에서 100%를 보여주지 못하는 건 선수로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힘든 결정을 내렸습니다’라고 썼다.

“연초부터 안 좋았는데 조코비치와의 16강전을 앞두고 더 심해졌죠. 양발에 모두 진통제를 맞은 뒤 감각이 없어져 더 격하게 뛰게 됐고, 그래서 악화됐어요. 페더러와의 경기에 앞서 모든 물집을 터뜨리고 다시 진통제를 맞았지만 속살까지 드러날 정도가 돼 약효도 없더군요. 걷기도 힘들었어요.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2주 차까지 뛴 것도, 4강까지 가본 것도 처음이잖아요. 내 발도 한계를 못 넘은 거죠. 다음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정현 어머니 김영미 씨(물리치료사 출신)는 아들 부상이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 “뼈가 보인 건 아니다. 그랬다면 아마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버지 정석진 씨는 “현이가 어려서부터 아파도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계 카메라 화면에 ‘캡틴 보고 있나’라는 문구를 자신과 함께 속해 있다가 해체된 삼성증권 테니스팀 김일순 전 감독(여)에게 적어 보내기도 했다. 정현은 “김 감독님은 늘 대회 도중엔 한 번도 연락을 안 하신다. 부담을 줄까 봐 그렇다. 어제 통화했는데 (문구 적는 걸) 제대로 못 봤다고 나중에 다시 하라고 하셨다(웃음)”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축전을 받은 정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회 기간 국민들께서 보내주신 많은 관심과 성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을 응원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답글을 올렸다. 정현은 평창 올림픽에서 한국체대 동료들이 많은 쇼트트랙 경기를 보며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테니스를 포함한 아시아 테니스가 저로 인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는 그는 “지금까지는 테니스가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인기 종목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 돼지고기 먹고, 실컷 누워 있고 싶은 20대 젊은이

정현은 장롱면허 소유자다. 겁이 많아 운전을 못한다고 했다. 운전 연습할 시간에 공이라도 한 번 치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는 한때 유명해지면 고급 승용차를 사고 싶다고 했다. 호주오픈에서 약 7억5900만 원의 상금을 받은 그는 “이제는 차에 관심이 없어지고 집에 관심이 많다. 20대 후반에 혼자 힘으로 집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지낸 시간이 많은 그는 “외국에선 쇠고기 위주로 먹게 된다. 한국 가면 돼지고기부터 실컷 먹고 싶다”고 말했다. “대회 기간엔 보통 하루 4끼를 먹어요. 샐러드나 과일로 첫 끼를 시작한 뒤 그 다음 빵 또는 밥을 먹고 경기 전에 파스타를 주로 찾죠. 경기 후 영양이 충분한 스테이크나 중국 음식으로 마무리해요.”

정현은 “취미 가운데 하나가 침대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구는 거다. 질리도록 한번 누워있고 싶다”며 웃었다. 태블릿PC로 전자책 읽기를 즐긴다. 정현은 “전쟁, 총싸움이 많이 나오는 판타지 액션물을 즐겨 본다. ‘갓 오브 블랙필드’라는 책이 너무 재밌다. 책 때문에 늦게 자기는 처음이다”고 말했다

‘천재형이 아니고 노력형’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 그는 “관중 1만5000명이 꽉 찬 큰 코트에 입장할 때의 환호, 하나도 잊을 수 없어요. 이런 무대에 왜 서고 싶은지, 얼마나 잘하고 싶은지 저절로 알게 됐어요. 더 이상 기권해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몸 관리부터 철저하게 할 겁니다.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 올 거예요. 계속 지켜봐 주세요”라고 말했다.

멜버른=김종석 kjs0123@donga.com / 인천=김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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