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한국과 북한의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스웨덴과 가진 첫 연습경기. 한국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단일팀에 대한 찬반이 팽팽해, 무조건 찬동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그린 통일기를 손에 든 사람들과 관객석에 앉아 있노라면 평소 한국대표에 대한 응원 이상의 뜨거움이 확실히 느껴진다.
단일팀은 1991년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일본 지바)와 축구 청소년세계선수권(포르투갈) 이래 처음이다. 당시 탁구는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했다. 한국의 현정화, 북한의 리분희 콤비는 팀의 상징이었다.
1월 하순, 서울에서 만난 현 씨는 “단일팀은 정치적 화평, 대화를 위한 시도”라고 말을 꺼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지금은 스포츠사업을 하는 사단법인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번 아이스하키의 경우 첫 경기를 16일 앞둔 시점의 합류였다. 1991년에도 겨우 1개월 전에 합류했다. 게다가 리분희가 간염을 앓아 연습은 하루 30분씩으로 제한됐다. “그런 가운데 서로 단점을 덮어주고 장점을 끄집어냈다”.
리분희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이기며 올라갔다. “재일본대한민국 민단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함께 응원하고, 한국의 4000만 명이 아니라 남북 합쳐 7000만 명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을 냈다”(현 씨).
결승 상대는 9연패를 노리는 중국. 승부는 5번째 팀에서 갈렸다. 리분희 대신 기용돼 “자신이 없다”며 나간 북한의 루키 유승복이 이겼다. 현 씨는 락카룸에서 울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몸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이 있었다.”
그 뒤 북한 유도선수가 한국에 망명하는 사건도 있어 남북체육회담은 중단됐다. 현 씨와 리 씨는 1993년 세계선수권(스웨덴)에서 대결했다. 식당에서 만나 “입에 맞는 음식이 없다”고 말하는 리분희에게 현정화는 김치와 김을 줬다. 그 뒤 만나지 못했다.
남북은 2000년 공동선언에 ‘문화·스포츠 교류의 활성화’를 넣고 같은 해 시드니 올림픽에서 첫 공동입장을 실현했다. 이는 2007년 동계아시아대회(중국)까지 국제종합대회에서 9차례 이어졌다. 그러나 2008년 한국에 대북강경 정책을 취하는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뒤 평창까지 이같은 흐름은 끊겨 있었다.
단일팀도 27년만이다. 현 씨는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력이 비슷하고 하나가 되면 경기력이 올라가는 종목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리분희는 조선장애자체육협회 서기장. 3월 패럴림픽에 방한할 가능성이 있다. “만나야 한다. 장애인 스포츠를 비롯해 교류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서기장이라면 꽤 높은 지위다. 본인 의사가 있으면 가능하다. 나도 돕고 싶다.”
정치 흥정의 측면을 부정할 수 없는 단일팀.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현 씨의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또다시 흐름이 끊어진다면 이번 올림픽 무대에 선 선수들이 과거의 현 씨처럼 “정치에 이용당했다”는 씁쓸한 뒷맛만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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