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에 쓰러진 비운의 쇼트트랙 전설 그가 못 다한 꿈, 평창서 대신 이뤄야 황대헌·임효준·서이라 어깨 무거워
“(전략) 부담 갖지 말고 늘 연습해 오던 대로 자신감 있게 경기해 줬으면 좋겠어. 서로서로를 믿고(중략) 모두 웃으면서 돌아왔으면 좋겠어. 여자들도 긴장하지 말고 해오던 대로만 하면 정말 좋은 결과가 나올 거 같으니까 마지막까지 파이팅하자!”(4년 전 노진규 선수가 쇼트트랙대표팀 동료들에게 썼던 편지의 한 부분.)
● 한국은 왜 쇼트트랙 1500m에 강할까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 1500m. 금메달이 가장 유력한 종목이다. 10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한판승부를 펼친다. 지난 4번의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2006년 안현수, 2010년 이정수)을 따낸 강세 종목이다. 유럽의 한 도박사이트에서는 황대헌 선수의 금메달 확률을 가장 높게 점치고 있다. 황 선수는 2017-2018 월드컵 4개 대회 동안 1500m에서 금2, 은2를 따며 종합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또한 월드컵 1차 대회에서 1000m, 1500m 금, 500m 은메달을 따며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데뷔한 임효준 선수, 지난 시즌 세계선수권 개인 종합 우승을 차지한 서이라 선수도 올림픽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어쩌면 대한민국 선수 3명이 금, 은, 동메달을 모두 거머쥐며 시상대를 독차지할지도 모른다.
1500m는 쇼트트랙 올림픽 개인 종목 중에서도 남녀 모두 제일 자신 있는 종목이다. 힘과 스피드를 앞세우는 서양, 중국 선수들과 달리 전통적으로 기술, 체력이 좋은 대한민국 선수들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세계선수권,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왔다.
● 쇼트트랙 1500m의 전설, 노진규를 기억하나요?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이름, 노진규. 그는 1500m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성실성과 열정을 바탕으로 강한 체력을 키운 그는 2011-2012 시즌 월드컵 대회 1500m 6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11년 상하이에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 결승에서는 대표팀 선배 안현수가 8년 전에 세웠던 세계기록을 갈아 치울 정도로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소치올림픽을 앞두고 왼쪽 어깨에 종양이 생겼다. 수술이 필요했지만 올림픽 출전을 위해 수술을 연기하고 월드컵 출전을 강행했다. 본인이 출전하지도 못하는 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부여잡고 악전고투하여 출전권을 따오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다 왼쪽 팔꿈치 뼈가 골절돼 노진규의 올림픽 출전은 무산됐다. 엎친데 덮쳐 수술 중에 악성 골육종이 발견돼 생명까지 위협 받았다. 수술 후 한때 회복되는 듯했으나 다시 병세가 도져 2016년 4월 3일 짧고도 강렬했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별명인 ‘어린 왕자’처럼 순수함과 젊음을 간직한 채 영원의 별로 떠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영면한 날은 2016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마지막 날이었다. 그의 대표팀 동료, 선후배들은 대회 후 휴식을 취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빈소로 향해야 했다. 특히 대학동기인 서이라는 국가대표 선발전 종합 3연패를 하는 경사를 맞이했음에도 친구의 죽음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 한국체대 동문 황대헌 임효준 서이라, 노진규를 기억하라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18년 2월 10일. 황대헌, 임효준, 서이라 세 선수가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500m에 출전한다. 노진규와 한국체육대 동기인 서이라뿐만 아니라 임효준도 한국체대 동문이다. 황대헌도 한체대 입학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체대 선후배 3명이 1500m의 전설이었던 동문 노진규의 못 다한 꿈에 도전하는 것이다. 특히 유력한 금메달 후보 황대헌은 롤모델로 노진규를 꼽은 바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남자 1500m는 쇼트트랙에 걸린 첫 번째 금메달이자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번째 금메달 유력 종목이기에 대한민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성적뿐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팀 전체의 성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평창동계올림픽 전체의 흥행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경기임엔 분명하다. 가장 좋은 그림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사이좋게 1, 2, 3위로 골인하여 하계 올림픽 양궁에서나 보던 금 은 동 싹쓸이를 해오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8년 전 밴쿠버올림픽 1500m 결승전에서 연출됐던 장면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당시 3위를 달리던 이호석은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다가 2위인 성시백과 엉켜 넘어지면서 실격을 당했다. 또한 성시백도 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커다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국민적인 관심이 쏠릴 이 경기에서 유사한 장면이 연출된다면 그 후유증 또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쇼트트랙이란 종목이 가진 매력이자 모순이다. 개인종목이자 또한 국가대항전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수들의 현명한 판단과 코칭스탭의 효율적인 전략이 필요하다.